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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무너진 반도체 글로벌 분업… 美-日-EU, 설계서 제조까지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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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투자 속도전, 뒤처지는 韓]

막대한 보조금으로 투자 빨아들여

美, 해외기업 유치 36%… EU 81%

보조금 없는 韓, 투자유치 계획 모호… 최대 25% 세액공제도 연내 일몰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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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반도체 분업 체계가 사라진 자리에 753조 원 규모의 ‘쩐의 전쟁’이 시작됐다. 한국이 국내 기업 투자만 바라보는 사이 주요 경쟁국들은 보조금 정책과 세제 혜택을 앞세워 6년 뒤를 겨냥한 속도전에 뛰어들었다.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서의 한국의 입지가 위험해졌다.

● 美 해외 유치가 36%, EU는 81%

8일 동아일보와 산업연구원 분석 결과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이 본격화된 2021년 이후 각국에서 발표된 투자 프로젝트 중 상당 부분을 해외 기업 투자가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의 경우 발표된 전체 투자 계획 중 해외 기업 유치 건이 35.8%를 차지했다. 일본은 32.1%였고 유럽연합(EU)은 80.7%에 달했다. 분석에서는 반도체 관련 제조 설비 투자만 집계했으며 소재·부품·장비나 연구개발(R&D) 기지 등은 제외했다.

미국은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제조 공장 건설에 5∼15%, 총 390억 달러(약 53조 원)를 보조금으로 지원한다. EU도 총 430억 유로(약 63조 원)를 반도체 보조금 등에 투입하고 있다. 일본도 투자 건별로 수조 원의 보조금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그 결과 미국은 2021년 이후 총 1164억 달러의 해외 투자를 유치했다. 최대 사례는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다. 애리조나주에 650억 달러(약 89조 원)를 투입해 4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및 2나노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다. 이 외에 삼성전자(텍사스주·450억 달러), SK하이닉스(인디애나주·39억 달러), NXP(텍사스주·26억 달러)가 미국에 둥지를 틀 예정이다.

그간 반도체 시장 입지가 약했던 EU는 적극적인 보조금 정책을 통해 인텔(독일 마그데부르크·330억 달러), 글로벌파운드리(독일 드레스덴·80억 달러) 등 미국 기업들의 파운드리 투자를 이끌어냈다. 해외 기업과의 합작 투자에도 적극 나섰다. 차량 반도체 1위 독일 인피니언과 네덜란드 NXP 등 전통적인 반도체 설계 강호들이 TSMC와 합작해 총 100억 유로 규모로 독일 드레스덴에 짓고 있는 공장이 대표 사례다.

엔화 약세를 무기로 투자 유치 공세를 벌이고 있는 일본도 무시 못 할 상대다. 2021년 이후 TSMC(구마모토·200억 달러), 마이크론(히로시마·32억 달러)을 비롯해 메모리·파운드리 생산 공장을 대거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 주요국들 ‘2030년 제조강국’ 겨냥 속도전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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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투자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2030년 내 집행이 완료돼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즉, 6년 뒤에는 새로운 반도체 세계 지도가 완성되는 셈이다. 투자 시점뿐만 아니라 보조금 지급 규모와 공장별 세부 용도까지 대부분 윤곽이 그려진 상태다.

총 3256억 달러 투자를 유치한 미국에서 가장 대규모 건에 해당하는 인텔(1000억 달러)과 TSMC(650억 달러)의 완공 및 가동 목표 시점은 당장 내년부터 도래하기 시작한다. 인텔의 애리조나 1공장은 내년 상반기(1∼6월) 첫 양산을 시작할 것으로 관측된다. TSMC도 애리조나 1공장은 내년 상반기, 2공장은 2028년 양산을 앞두고 있다. 모두 2030년 내 총투자를 마무리하는 게 목표다.

EU도 주요 팹 신·증설 계획에 가속도를 붙였다. 인피니언이 사상 최대 규모(53억4000만 달러)를 투자한 드레스덴 전력 반도체 공장은 2026년 가동을 시작한다. 인텔의 마그데부르크 팹도 2027년 완공이 목표다.

대만 역내 투자에서 최대 비중을 차지한 TSMC의 타이난 팹은 2025년 말까지 600억 달러가 투입된다. 일본도 주요 대기업 연합체로 설립된 라피더스가 45조 원 규모의 홋카이도 파운드리 공장에서 2027년 2나노 제품 양산 목표를 밝혔다.

● 삼성·SK만 바라보는 한국, 2047년 로드맵만

2030년 반도체 세계 지도 역변을 앞두고 전통 반도체 제조 강국인 한국의 역내 투자 계획은 모호하다. 정부가 나서 2047년까지 이어지는 경기 용인, 평택 거점의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을 발표했지만 업계는 “업황, 투자 요건에 따라 현실화 가능성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앞서 1월 정부는 ‘제3차 민생토론회’에서 2047년까지 삼성전자가 360조 원, SK하이닉스가 122조 원을 투입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한편 삼성전자가 평택 캠퍼스에 추가로 12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가 20조 원을 들여 충북 청주에 짓기로 한 M15X 팹까지 총 622조 원이 국내에 투입된다. 하지만 M15X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팹의 용도나 가동 시점 등은 특정되지 않았다.

양대 기업에만 의존하는 상황에서 주요국과 달리 국내는 보조금 정책도 전무하다. 국가전략기술 시설 투자에 대해 최대 25%를 세액공제해 주는 법안마저 올해 일몰을 앞두고 있다. SK하이닉스 용인 팹은 전력, 용수 인허가, 지역 주민 보상 절차 등이 난항을 겪으며 착공 일정이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지연됐다. 발표 6개월 만에 건설에 돌입한 TSMC 구마모토 공장과 대조된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경쟁국들이 생각보다 속도전에 강하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며 “2030년 이전 인공지능(AI) 반도체로 새로운 질서가 정해질 텐데, 국내의 투자 지원 속도는 느리고 인재 부족 등 고질적인 문제가 여전해 경쟁력을 잃어가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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