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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15년 전 집단성폭행 자백' 중학교 동창 유서…"증거능력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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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무죄→2심 실형→3심 무죄 취지

15년 전 집단 성폭행 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이 담긴 중학교 동창의 유서를 결정적 증거로 삼아 유서에 공범으로 기재된 동창생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됐다.

대법원은 전문증거인 해당 유서가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특신상태'에서 작성됐다고 보기 어려워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아시아경제

서울 서초동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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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상 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남성 3명에게 각각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유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이를 유죄의 주요 증거로 삼아 이 사건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한 원심의 판단에는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A씨는 2021년 3월 서울 양천구 아파트에서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유서에는 "너무나 죄송하다"라는 말과 함께 친구 3명과 함께 2006년 중학생 1년 후배인 피해자에게 술을 먹이고 집단으로 강간한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세 명의 친구 중 한 명과 1개월 정도 사귀다 헤어진 피해자를 불러내 그 친구와 다시 사귀게 해준다는 구실로 소주 2병을 마시게 한 뒤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상대로 함께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유서에는 자신의 과거 잘못을 반성하는 내용과 함께 "이 사건이 꼭 해결되기를… 공소시효도 남았고…"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A씨의 사망을 변사로 처리한 뒤 유서를 바탕으로 특수준강간 혐의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유서에서 A씨가 공범으로 지목한 3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수사 기관에서 범행일로 추정되는 날 실제로 술에 취한 채 귀가했고 속옷에 피가 묻어있었다며 A씨의 유서 내용과 부합하는 진술을 했다.

범행 추정일 다음 날 모친과 함께 산부인과를 방문했고 피임약을 처방받은 사실도 확인됐지만, 당시 의사가 성범죄 피해와 관련한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2021년 12월 세 사람을 특수준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1심 법원은 A씨의 유서의 증거능력을 부인, 세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의 쟁점은 A씨의 유서를 형사재판의 증거로 쓸 수 있는지였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사건관계인이 사망해 재판에서 직접 진술할 수 없는 경우, 그가 남긴 진술서 등 증거는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됐다는 점이 증명돼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특신상태는 진술 내용이나 작성 과정에 허위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고, 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자발성)을 담보할 구체적 외부 정황이 있는 경우 인정된다.

재판부는 "망인이 작성한 이 사건 유서는 형사소송법 제313조 1항, 제314조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이 법원이 위 증거를 채택해 증거조사를 했으므로 이 판결을 통해 위 증거에 대해 증거배제결정을 하기로 한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설령, 이 사건 유서에 대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증거인 이 사건 유서는 앞서 본 바와 같이 핵심적인 내용이 피해자와 다른 증인의 진술, 그밖에 객관적인 정황과 배치되는 점, 피해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이 사건 당시 성폭력을 당했는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고, 이 사건 직후 이뤄진 산부인과 진료과정에서 성폭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 여러 사정들에 비춰 볼 때, 이 사건 유서는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려우므로 이 사건 유서의 기재만으로 이 사건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를 불러낸 과정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과 다른 증인의 진술이 일치했던 반면, A씨 유서에 기재된 것과 달랐던 점과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성범죄 정황을 발견하고 사후피임약을 처방한 것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걱정이 되면 처방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처방해 준 점 ▲의사가 법령상 신고의무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에 성범죄 피해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던 점 ▲사망 전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A씨가 망상이나 환각 증상을 겪었을 수도 있는 점 등을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반면, 2심 법원은 A씨가 남긴 유서의 증거능력과 내용의 신빙성을 인정, 세 사람에게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재판부는 ▲성경험이 없는 14세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는 전문심리위원(산부인과 전문의)의 진술과 ▲환각 상태나 망상으로 인해 유서를 작성했다고 볼만한 정신병리적 상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전문심리위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의견 ▲A씨가 사망하기 전 인터넷을 통해 '공소시효', '특수강간집행유예', 청소년특수강간자수' 등 이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된 키워드들을 검색하고, 유료 법률상담을 통해 '민법상 성년 나이 개정 후 공소시효의 기산점', '미성년자일 때 공소시효가 중단된 경우 성년인 경우 언제부터 공소시효가 다시 진행되는지', '민법상 성년 나이 개정 전후의 아동·청소년성보호법이나 성폭력범죄처벌법의 공소시효 기산일' 등에 관한 상담을 받은 점 ▲A씨가 허위 내용으로 이 사건 유서를 작성함으로써 피고인들을 무고할 만한 동기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점 등을 근거로 A씨가 작성한 유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유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했다.

재판부는 "유서 내용이 법정에서의 반대신문(피고인 측이 증인을 신문하는 절차) 등을 통한 검증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신빙성이 충분히 담보된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A씨가 숨지기 전날 술을 함께 마신 친구를 비롯해 15년간 누구에게도 이 사건을 언급한 적이 없고, 피고인 3명에 대한 형사처벌을 목적으로 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진실만 기재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사건 유서는 그 작성 동기가 명확하지 않고, 수사기관에서 작성 경위, 구체적 의미 등이 상세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게다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무려 14년 이상 경과된 후 작성됐고, 그 주요 내용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증거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일부 내용은 피해자의 진술 등과 명백히 배치되기도 한다"라며 "망인에 대한 반대신문이 가능했다면 그 과정에서 구체적, 세부적 진술이 현출됨으로써 기억의 오류, 과장, 왜곡, 거짓 진술 등이 드러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사실상 유일한 유죄 증거였던 A씨 유서의 증거능력이 대법원에서 부인된 만큼 파기환송심에서는 세 사람에게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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