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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오늘과 내일/박용]모두를 패자로 만든 무책임 ‘연금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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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박용 부국장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연금은 보험료율(18%)이 국민연금의 두 배지만 1993년부터 적자다. 그걸 정부가 해마다 세금으로 메꿔주고 있다. 내년엔 역대 최대 규모인 10조 원 안팎을 쏟아부어야 할 판이다. 연금 받는 퇴직 공무원이 69만 명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혈세로 지탱하는 공무원연금은 16년 뒤 적자로 돌아서는 국민연금의 ‘예정된 미래’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공무원연금의 약 17배, 수급자는 10배가 넘는다. 거대한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수백조 원의 혈세를 쏟아부어도 버티기 어렵다. 미래 세대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다. ‘연금 디스토피아’의 문이 열리고 있는 데도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이후 9%에 묶여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개혁을 미루고 또 미룬 결과다. 그래놓고 세금으로 뿌리는 기초연금만 경쟁하듯 올리고 있다.

개혁 방향 합의조차 시민에게 떠넘긴 국회

개혁의 총대를 멘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조차도 기한을 두 번이나 연장하더니 임기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유럽 출장을 가서 논의하겠다는 황당한 여유를 부렸다. 여태 소득안정에 무게를 둬야 할지, 재정안정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연금개혁 방향에 대한 합의조차 못한 여야가 해외에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과 같은 모수만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숫자 개혁’을 하겠다는 건가.

김상균 국회 연금특위 공론화위원장은 지난달 ‘더 내고 더 받는’ 식의 국민연금 개혁안을 선택한 시민대표단 설문조사 결과를 내놓으며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고 했다. “국회가 공론화 과정으로 도출된 방향성을 충분히 고려해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연금개혁 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개혁 방향에 대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국회의 시간’이 선행해야 제대로 된 개혁이 된다. 그걸 건너뛰고 이해당사자인 시민들에게 ‘소득보장’과 ‘재정안정’ 중 양자 택일을 하라는 선택지를 덜컥 던졌으니 세대 간 불신과 갈등이 커졌다. 미래 세대는 “왜 조금 더 내고 많이 받아 가느냐”고 반발하고, 기성세대는 “더 내면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한다. 내면에 깔린 ‘손실 회피’ 성향이 작동하면, 사람들은 모두가 패자가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모두가 승자’ 믿음 생겨야 연금개혁 성공

이해관계자가 많은 까다로운 개혁이 성공하려면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야 한다. 우리는 노후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미래 세대와 연금 재정을 희생할 수 없고, 재정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노후 빈곤을 방치할 수도 없는 ‘복합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더 많이 내되 조금만 더 올려 받는’ 식으로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길’의 방향을 정치권이 제시하고 전문가들에게 얼마를 더 내고 얼마나 더 받으면 지속 가능한지 합리적 실행 방안들을 내게 했다면 국민의 선택은 한결 쉬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치권이 쳐놓은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이라는 틀에 갇혀 각자의 손실만 따지는 각자도생을 고민할 일도 없었다.

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생기면 모수개혁과 함께 기업 설득이 필요한 납입기간 연장과 정년 연장, 소득재분배 기능이 겹치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역할 조정, 일본처럼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게 연금액을 수정하는 자동조정장치 도입과 같은 어려운 개혁 과제도 추진할 힘이 생긴다. 그래야 어떻게 더 내고, 얼마를 더 받아야 할지 개혁의 선택지도 넓어진다. 2040년이면 국민연금을 마지막으로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 4대 연금이 모두 적자로 돌아선다. 그때가 되면 모두 진짜 패자가 된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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