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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정착지원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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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통일부 내부 모습. 탈북민 정착 지원 정책을 총괄하는 정착지원과는 정면 문이 열린 비상계단 옆에 자리 잡고 있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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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 통일부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건물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 와룡근린공원에 위치한 남북관계관리단 사무실이다. 지난해 9월까지 50년 동안 남북회담본부로 이용됐다.

이 건물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모르게 개인 별장을 짓던 중 발각되자 “북한 손님들이 올 때 회의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둘러대면서 생겼다.

울창한 숲과 만발한 꽃들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건물은 지금도 호화 별장 느낌이 물씬 난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발아래 펼쳐진 서울시내를 바라보면 ‘백만 불짜리 뷰’가 이런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남북관계관리단의 주 업무는 남북회담 준비다. 2020년부터 단 한 건의 남북 간 회담도 없었는데, 앞으로 전망은 더 암울하다. 올해 초 김정은은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통일, 겨레, 민족이란 단어조차 삭제하고 대남기관들을 모두 없앴다. 남북회담의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 탈북민 정착 업무를 담당하는 통일부 인권인도실 정착지원과는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8층 옥외비상계단 옆에 있다. 과거 비상계단에 흡연실이 있어 가장 안 좋은 위치로 인식됐다. 인사에서도 정착지원과는 ‘유배지’ ‘변방’으로 치부됐다. 통일정책실이나 교류협력국을 거치면 승진이 빠르지만, 정착지원과는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정착지원과장은 4번이나 바뀌었다. 과장이 자주 바뀌면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렇다고 일이 적거나 업무 비중이 작은 것도 아니다. 통일부 사업비 중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예산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정착지원과 소속 공무원 10여 명이 통일부 사업비의 절반을 소화해야만 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서류들로 통일부에서 탈북민을 가장 만날 시간이 없는 사람이 정착지원과 공무원들이다.

#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월 국무회의에서 “북한이탈주민은 우리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다. 정부는 탈북민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제정하라”고 주문했다. 공교롭게도 김건희 여사가 탈북민들을 거짓말쟁이라고 지속적으로 공격해온 사람을 만나 “남북문제에 직접 나서겠다”고 말하며 명품백을 받는 동영상이 공개된 지 한 달 반이 지난 시점이다.

남북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자 탈북민을 대표 상품으로 내세운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지만, 윤 대통령이 탈북민의 성공적 정착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믿는다.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급히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일인 7월 14일이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최종 결정됐다. 대통령의 관심 사항이니 제1회 행사는 전국에서 성대하게 열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와 기관 등이 탈북민을 위한 사업 성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앞으로 ‘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이라는 이름의 행사들이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고, 탈북민들은 여기저기 행사에 제발 참가해 달라는 읍소에 가까운 요청을 수없이 받게 될 것이다.

# 지금까지 탈북민 정착 지원 정책의 주요 목표는 ‘사회 통합’이었다. 자연스럽게 사회에 녹아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정착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북에서 온 사람임을 자꾸 부각시키고, 큰 특혜를 받는 것처럼 보여진다면 통합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탈북민들을 만나 보면 정부의 탈북민 지원 정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탈북민은 우리 사회가 나서서 정착을 도와주어야 하는 계층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막상 정착 지원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정착지원과는 통일부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구석에 있어 찾기도 힘들다.

통일부 인력의 2.5%에 불과한 인력이 부처 예산의 50%를 사용하느라 문서 더미에 파묻혀서 정작 탈북민 구경도 못 하고 있으니 탈북민보다 먼저 도움이 필요한 곳은 정착지원과가 아닐까 싶다. 정착지원과가 정착지원국으로 승격돼 인력도 늘어나고, 통일부 건물에서 제일 좋은 자리로 옮겨지고, 정착지원국을 거쳐야만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길 때 대통령의 진심이 와닿을 것 같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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