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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우리말의 품격 "참 웅숭깊구나" [한주를 여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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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 이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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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분옥의 '뒷북'

풋낸가 새물낸가 암내 살내 그도 아닌

푹 삭은 곤쟁이젓 생이젓 그도 아닌

차라리 얼간 돔배기 걸싸게나 씹을거나

앉은일 선일 두고 이제 와 무슨 뒷북

엊저녁 풋잠에 든 얼간이 오사리 놈

저 풀 센 다듬잇살 당겨 스룬다면 스루지

시퍼런 많은 날들 바람 등에 업혀서라도

하룻밤을 못 넘길까 언약도 말도 두고

뼈마디 녹아난다 한들 집채만 한 울음을

「두레문학」 27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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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분옥 시인은 한 편의 시조에 많은 순우리말을 담아냈다.[사진=펙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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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형시조 3수가 모인 시조 「뒷북」은 나날이 훼손되고 있는 시조의 품격을 제대로 지키고 있어 인상 깊게 읽었다. 오늘날 크게 유행하고 있는 엇시조나 사설시조도 보면 어떤 것은 이게 시조라는 생각이 안 들고 이건 시조가 아닌데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자칫하면 시조도 아니고 현대시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을 시조라고 발표할 수 있는데 「뒷북」은 현대시조의 모범작으로 거론할 만하다.

제목 '뒷북'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이 끝난 다음에 뒤늦게 쓸데없이 수선을 피우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뒷북치다'란 말을 쓰고 있다. 한 편의 시조 속에 이렇게 많은 순우리말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던가. 특히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스루다(활용형 스룬다)란 낱말을 썼다는 것이다.

스루다는 쇠붙이를 불에 달궈 무르게 하다, 풀이 센 빨래를 잡아당겨 풀기를 죽이다, 마음이나 속을 태우다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이 가운데 두번째 뜻을 취한 게 아닌가 한다. 시인이 가려 쓴 순우리말의 낱말 풀이를 먼저 해본다.

풋내: 새로 나온 푸성귀나 풋나물의 냄새.

새물내: 빨래 후 갓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암내: 발정기의 암컷의 몸에서 나는 냄새.

곤쟁이: 보리새우와 비슷하게 생겼고 몸이 작고 연하다. 곤쟁이로 만든 젓이 곤쟁이젓.

생이: 갑각류 새뱅이과의 한 종으로 토하라고도 함. 생이로 만든 젓이 생이젓.

얼간: 소금을 약간 뿌려 조금 절인 간.

돔배기: 제사상에 놓는 상어 고기.

걸싸다: 동작이 몹시 재빠르다.

앉은일: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 ↔ 선일.

오사리: 이른 철의 사리에 잡힌 새우. 잡것이 많이 섞여 있음.

오사리(잡)놈: 온갖 못된 짓을 거침없이 하는 잡놈.

다듬잇살: 다듬이질이 알맞게 되었을 때 다듬잇감에 생기는 풀기나 윤기.

한편의 시조를 읽는 동안 이렇게 많은 우리말 공부를 했다. 그 어떤 존재가 화자에게 이런저런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닌, 이런저런 젓갈도 아닌 것을, "차라리 얼간 돔배기(를) 걸싸게나" 씹게 한다. 일단 여기서 한 장이 끝난다.

그 어떤 존재는 또 앉은일 선일 두고 이제 와서야 뒷북을 치게 한다. 때늦게끔 말이다. "엊저녁 풋잠에 든 얼간이 오사리 놈"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 풀 센 다듬잇살(을) 당겨 스룬다면 스루지"도 뒷북치는 것과 연결된다. 왜 용기를 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했는가 후회막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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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두레문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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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수에 가서 앞 두 수에서 보여준 망설임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 곡진한 내 언약을, 진심어린 내 말을 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고 들이다가 마침내 집채만 한 울음을 터뜨린다. 뼈마디가 녹아나는 내 고백을 너는 알아들었는가. 화자가 타자에게 말한다. 시인이 독자에게 말한다. 정말 알아들었느냐고.

이 시조는 고졸한 시조의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구태의연하거나 고색창연하지 않고 독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줌으로써 무언의 대화가 이뤄지게 한다. 문명의 속도는 속전속결이지만 문학은 그 속도전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유유자적하거나 관망하는 태도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뼈마디 녹아난다 한들 집채만 한 울음을"에 이르는 과정이 참으로 웅숭깊어(생각이나 뜻이 크고 넓어) 이 작품이 시조다워졌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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