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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가격이냐 품질이냐…열차 입찰, 어떤 방식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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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국내에서 코레일과 SR(수서고속철도), 서울교통공사 같은 철도운영사들이 새로 열차를 도입하면서 적용하는 입찰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2단계 경쟁 입찰’이고, 다른 하나는 ‘협상에 의한 계약’으로 국가계약법 시행령에도 들어있다.

흔히 ‘최저가 입찰제’로 불리는 2단계 경쟁입찰은 1단계로 제품 수량과 품질, 보유기술 및 지식, 신용평가등급, 납품지연 여부 등에 대한 기술평가를 거쳐 이를 통과한 업체 중에서 2단계로 입찰가격을 확인해 가장 낮은 금액을 쓴 곳을 낙찰자로 정하는 방식이다. 기술평가는 85점(100점 만점) 이상이면 합격이며, 2단계에선 가격만 따진다.



최저가 입찰 탓 품질 저하 논란

“기술력 고려 평가해야” 주장도

납품가 급상승 등 부작용 우려도

적정 가격에 좋은 품질 찾아야

협상에 의한 계약은 업체가 제출한 기술제안서와 가격제안서를 함께 평가해 높은 점수를 얻은 순으로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 뒤 협상이 마무리되면 낙찰자로 확정하는 방식이다. 최저가 입찰제에선 기술평가가 통과와 탈락 여부만 따지는 절차지만 협상에 의한 계약에선 기술평가점수와 가격점수를 모두 합산한다. 코레일의 경우 기술평가를 80%, 가격은 20%를 반영한다.

최저가 입찰 vs 협상에 의한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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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부터 경부선과 호남선을 운행할 차세대 고속열차 ‘KTX-청룡’의 모습. 최고 시속 320㎞로 국내에서 가장 빠른 고속열차다. 100% 국내 기술로 설계, 제작됐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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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철도운영사들은 두 방식 중에 대부분 최저가 입찰제를 적용해 왔다. 무엇보다 열차 구매 예산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커서다. 그런데 요즘 철도업계에서 열차 입찰방식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최저가 입찰제로 인한 부작용이 큰 만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협상에 의한 계약 등의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대로템과 우진산전, 다원시스 등 3곳의 국내 열차제작업체 중에선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로템과 관련 부품업체들이 이런 주장에 힘을 싣는다고 알려져 있다. 현행 1단계 기술평가로는 해당 업체가 보유한 기술력 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워 변별력이 없는 데다, 2단계에선 기술평가 점수는 배제한 채 낮은 가격만 보기 때문에 과도한 저가 경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지나친 가격 경쟁 탓에 열차제작업체들의 채산성이 악화하고, 중국제 등 값싼 외국산 부품이 대거 사용되고 있다”며 “어렵게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기술이 경쟁에 밀려 사장될 거란 우려도 나오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과도한 저가 수주가 상습적인 납품 지연과 열차 고장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철도노조도 지난달 19일 서울역에서 ‘수도권 전동차 화재 관련 근본적 안전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신형 전동차와 관련) 수도권 전동차 운행에 화재와 고장 같은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최저가 입찰제를 적정가 입찰제로 바꾸라”고 촉구했다. 코레일에 따르면 문제가 된 전동차는 중소업체인 우진산전이 제작해 납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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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그러나 우진산전 등 중소업체들은 “협상에 의한 계약으로 바꾸면 현실적으로 대기업인 현대로템이 거의 모든 입찰을 독식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면 또다시 예전처럼 현대로템이 국내 열차 시장을 독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유경쟁이 사라지고, 국내 철도산업 생태계가 붕괴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협상에 의한 계약을 할 경우 중소업체로서는 기술평가에서 뒤진 점수를 만회하려면 훨씬 더 낮은 가격을 써내는 수밖에 없어 경영이 더욱 어려워질 거란 우려도 있다. 중소업체 고위 관계자는 “저가입찰로 인한 납품지연을 많이 언급하지만, 대기업도 상당한 규모로 납품 지연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철도운영사도 최저가 입찰제의 개선 필요성은 인정한다. 백호 서울교통공사 사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최저가 입찰제 이후 전동차 품질이 낮아지고 있는 만큼 계약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며 “기술과 가격을 종합해 판단하는 종합심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입찰방식을 바꿀 경우 열차 구매 예산이 대폭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걸림돌이다. 최악의 경우 돈만 더 쓰고 품질은 별 차이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코레일의 고속열차 입찰에선 납품단가가 계속 상승했다. 최근 KTX-청룡으로 명명된 EMU-320의 경우 2016년 말 1량(칸)당 37억원이었던 입찰단가가 지난해 3월엔 52억원으로 41%나 뛰었다. 지금까지 고속열차는 모두 현대로템이 수주했다.

고속열차 입찰단가 7년 새 41% 뛰어

전문가 의견도 엇갈린다. 김동규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최저가 입찰제가 가격 경쟁을 촉진할 순 있지만, 품질저하와 납품 지연 등의 문제를 야기하고, 신기술 개발을 저해할 수 있다”며 “적절한 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측면에서라도 종합심사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민규 한라대 철도운전시스템학과 교수도 “당장은 납품 단가를 낮추는 게 예산 절감 효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저품질의 철도차량 부품 사용으로 이어질 수 있고, 결국은 차량 유지보수 비용의 증가와 조기 폐차, 그리고 무엇보다 사고나 고장으로 인해 국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매우 구체적으로 요구사양을 항목별로 평가할 수 있는 열차 입찰은 다른 분야와 달리 종합평가의 필요성이 높지 않다”며 “다만 최저가 입찰제의 단점을 줄이기 위해 기술평가의 내용과 범위를 강화하고, 발주처도 시장 상황을 합리적으로 반영해 ‘예정가격’을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따져보면 현실적으로 어떤 입찰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게다가 입찰방식에 따라 관련 업체 간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입찰방식을 둘러싼 갈등에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 정부와 철도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철도산업의 경쟁력을 살릴 수 있는 입찰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그 속에서 ‘적정 가격에 좋은 품질’이란 난제를 풀어내야만 한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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