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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의사 증원에 가려진 인력난… 판사 증원 법안 21대 국회서 폐기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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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사법부 "판사 늘리자" 한목소리
5년간 370명 증원안 400일 넘게 계류
한달 안에 처리 안 되면 처음부터 절차
한국일보

지난해 10월 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신임 법관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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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 임기는 다음 달 29일까지다. 국회 임기가 시작되면 지금 계류된 수많은 법안들은 '자동 폐기' 운명을 맞이한다. 방금 제출된 법안이든 이미 본회의 문턱에 가 있는 법안이든, 22대 국회에서 처음부터 다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갈 위기에 처한 법안 중 하나가 '각급 법원 판사정원법'이다.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판·검사 정원은 법으로 정확한 숫자를 정하는데, 현행 판사정원법은 '각급 법원 판사의 수는 3,214명으로 한다'고 콕 집어 정한다. 아무리 법원에 판사가 부족해도 이 법을 바꾸지 않으면 사법부가 법관 수를 늘릴 수 없다. 사법부 최대 현안인 재판 지연 사태를 해결하려면 판사정원법 개정이 필수적이지만, 정치권의 무관심 탓에 이번 국회 내 처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난도 높은 사건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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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평균연령 추이. 그래픽=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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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이달 기준 판사 정원은 3,214명(법정 인원)이고 현원은 3,105명이다. 현재 결원이 109명에 불과해, 법관 임용절차를 거쳐도 충분한 수의 법관 신규 임용이 어렵다. 판사 증원을 위한 여유분(버퍼존) 격인 정원 대비 결원율은 지난해 0.68%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육아 휴직 등을 이유로 실질 가동법관(대법관 및 법원장 등 제외) 숫자는 2,788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력 부족 상황은 더 심각하다.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판사정원법 개정안(정부 발의)은 이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판사 정원을 5년에 걸쳐 3,214명에서 3,584명까지 순차적으로 늘리자는 것이다. 사법부와 행정부가 한목소리로 판사를 늘리려는 것은 법원 접수 사건 자체는 줄고 있지만, 사건 난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어 처리 시간이 계속 늘어지기 때문이다.

법원에 접수된 본안사건 자체는 감소했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3년 160만5,623건이던 접수 건수는 23,9%가 줄어 2022년 122만1,301건을 기록했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판사 1인당 감당해야 할 부담은 더 늘었다. 9년 동안 줄어든 사건 38만 건 중 28만 건이 민사 소액 사건(소가 3,000만 원 이하)이다. 소액 사건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으로 관리가 가능한 사건으로 꼽힌다.

계속 늘어지는 형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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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판사 정원 및 결원율. 그래픽=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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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난도가 높고 갈등 정도가 큰 사건은 증가했다. 법원행정처 자체 분석 자료에 따르면, 민사 중액 이상 사건의 지난해 접수 건수는 2017년에 비해 약 16% 이상 증가했다. 지난해 민사합의 사건 처리 기간이 2017년에 비해 61.4% 증가한 것도 사건의 복잡성을 입증하는 근거다.

사법제도 변화로 인한 업무 부담도 늘었다.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형사소송법 개정 이후, 피고인이 조서를 부인하면 증거 능력이 없어져 같은 내용의 신문을 법정에서 반복해야 한다. 공판 횟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수도권 고법의 한 판사는 "모든 법리를 총동원해 '백화점식' 주장을 하는 변호인들도 많아졌는데 이럴 경우 물리적으로 재판부가 시간을 많이 쏟을 수밖에 없다"면서 "(과한 주장을 하는 피고인 때문에) 오히려 다른 불구속 재판 피고인이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받는 것 아닌지 신경 쓰일 때도 많다"고 토로했다. 일선에선 기피 부서인 형사재판부 업무 부담이 더 커졌단 불만이 많다.

경력법관제로 판사 고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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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대 대법원장이 2월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법관 증원의 필요성 및 재판 지연 문제 해결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대법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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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법조일원화(일정 경력을 갖춘 변호사 중에서 법관을 선발하는 것)의 부작용도 있다. 과거 사법연수생보다 나이가 많은 경력 변호사들이 들어오면서 판사들의 나이가 높아졌고, 체력적으로 사건 처리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2013년 30.4세던 신임 법관의 평균 연령은 지난해 35.8세로 확 높아졌다. 전체 법관 평균 연령은 2010년 38.9세에서 지난해 44.6세로 껑충 뛰었다.

2029년부터 10년 이상 경력자들만 법관에 지원하게 되면 이런 문제는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자격 문턱을 높이면 지원자 수가 줄어드는 게 당연하다. 과거에도 임용자격 법조경력이 3년에서 5년으로 상향됐던 2018년 선발된 신규법관은 36명에 불과했다.

사법부는 이번 국회에서 법안이 처리되지 않고 다음 국회로 넘어가면 재판 지연 문제를 제때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판사정원법 개정안은 이미 1년 4개월째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처리 전망은 밝지 않다. 수도권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코로나 이후 사건 적체 해소 노력이 본격화됐는데, 증원이 안 돼 재판부 수가 줄면 다시 사건이 쌓여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면서 "재판받는 국민 고통이 가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개정안이 법사위 전체회의에도 가지 못한 채 1소위에 계류돼 있는 만큼 최대한 신속하게 개정안이 처리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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