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2 (목)

[유석재의 돌발史전] 최초 공개, 1980년 4월 전두환 중정부장의 취임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원안 쓴 이종찬 “정보 수집 임무에 집중하겠다는 염원 담았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특정인을 찬양 고무하거나 폄훼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를 통해 역사의 한 단면을 조명하기 위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최근 본지의 ‘나의 현대사 보물’ 시리즈 취재를 위해 이종찬(88) 광복회장을 만났습니다. 공과와 평가를 떠나 그의 삶은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일부분과 다름없습니다. 제5공화국 시절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낸 실세였고, 3당 합당 이후 1992년 대선 직전 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경쟁했으며, 새정치국민회의의 부총재가 된 뒤 1997년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습니다. 이듬해 안기부장에 임명돼 1999년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했습니다. 지난해 5월 광복회장이 돼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지난 3월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에서 이종찬 회장이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건립을 준비하던 시절의 자료를 들고 있다./이태경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5공 정부에 참여한 것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하나회도 뭣도 아니었어요. 쓰라린 역사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1979년 10·26 사태 때 중앙정보부(중정) 부국장이었던 이종찬은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이 김재규 중정부장이라는 걸 듣고 무척 당혹스러웠다고 합니다. “자칫 월남 공작이 무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975년 월남(남베트남) 패망 이후 베트남 감옥에 갇혀 있던 이대용 공사 등 한국인 3인의 구출 시도를 중정에서 하고 있었는데, 공작의 전모를 아는 사람은 오직 김재규 부장뿐이었다는 겁니다.

그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김재규를 면회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잘못하면 그들이 모두 북한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호소였습니다. 전두환은 면회를 허락했습니다. 김재규는 이종찬에게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중간에 개입돼 있다”는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공작의 전모를 파악한 이종찬의 노력에 힘입어 세 한국인은 곧 풀려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때 전두환은 이종찬의 일처리를 눈여겨 봤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일보

1979년 11월 6일, 10.26 사태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조선일보 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2·12 4개월 뒤인 1980년 4월 15일, 전두환은 중정부장 서리에 취임했습니다. 중정 조직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취임식에 대해 이종찬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사복 차림의 전 장군은 취임식장으로 걸어들어오는 내내 웃음기 없는 굳은 표정이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단상의 부서장 자리는 모두 치워졌다. 부장 자리와 윤일균, 전재덕 두 차장이 배석할 자리만 마련되어 있었다. 취임사는 짧고 간결하였지만 듣는 이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이때 그 취임사를 기초한 사람이 바로 이종찬이었다고 합니다. 이종찬은 이때 중정 총무국장으로 승진한 뒤 중정 조직 개편에 뛰어들었고, 이후 민정당 창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인터뷰 중 저에게 ‘대외비(對外秘)’ 도장이 찍힌 문서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처음 공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가 원안을 썼다는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의 취임사 원문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 두 환 중장입니다.

오늘 본인은 대통령 각하의 명에 따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게 되었읍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어려운 중책을 맡게 되었음은 난국에 처한 국가의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당부(當部)는 지난 20여년간 조국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국가보위와 국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수많은 공적을 남긴바 있읍니다.

하지만 그 반면으로 일부 몰지각한 부원들이 월권과 이권 개입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 온것도 사실이며, 또한 과거에 부장직을 역임했던 인사중에는 현재 국외에서 매국적 작태를 서슴치 않고 있는 자, 자국의 국가원수를 시해함으로써 결국 나라를 위기속으로 몰아넣은 대역죄를 범한 자등이 포함되어 있음으로써 지금의 우리 중앙정보부는 상당한 불신을 받고 있읍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중앙정보부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만 할 실로 중차대한 시점에 이르렀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공적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내적으로는 알찬 정비를 하면서, 외적으로는 명실공히 국가안위를 뒷바라지 할 수 있도록 모든 충정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일이지만 과거 이란의 SAVAK가 국민을 괴롭힌 나머지 증오와 저주의 표적이되어 자체조직은 물론 국가까지도 결국 파멸시켰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모사드(MOSSAD)가 국민과 더불어 국난을 극복하고 국가를 지켜 나갈 수 있는 힘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충분한 교육과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정예요원들이 많이 보직되어 있기 때문에 당부는 어떠한 과업과 임무도 이를 능률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부원 여러분!

앞으로 본인을 정점으로 일치단결하여 어려운 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

1980년 4월 15일

부장 전 두 환

=========

취임사엔 서슬 퍼런 엄포가 들어있었습니다. ‘당신들 부장 중 한 명(김형욱)은 해외에서 매국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지 않느냐’며 공격하고 나서 ‘또 다른 부장(김재규)은 국가원수를 시해했다’며 강하게 질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부서장 이상 간부가 모두 사색이 됐고, 단상에 있던 윤일균 차장의 얼굴은 일순 흙빛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강한 인사개편을 예고하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과장 이상 부원으로부터 전원 사표를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취임사 말미에 ‘본인을 중심으로’가 아니라 ‘본인을 정점으로’라고 쓴 부분에서 왠지 공포스러운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이종찬의 원안에 있던 중요한 포인트는 ‘이란의 사바크(팔레비 시대의 국가정치안보국)가 되지 말고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되자’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잘못된 풍토를 일신하고 정보 수집이라는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자신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전두환의 중정부장 겸직에 미국 측이 불만을 갖자, 이종찬은 ‘취임사를 읽어보면 중정이 미국의 CIA처럼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려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이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온 기관을 개편하려면 계엄군이 나서서 단행할 수 밖에 없다’며 미국 측을 이해시키고자 했다는 겁니다. 전두환은 이해 7월 17일까지 중정부장 서리에 재직했고, 이후 유학성이 중정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쇄신’된 중앙정보국은 과연 본연의 정보수집 업무에 집중하게 됐던 걸까요?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 즉 ‘안기부’가 된 중정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조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전두환의 중정부장 취임사에서 ‘국민을 괴롭힌 나머지 증오와 저주의 표적이 됐다’는 표현이 생각날 지경입니다. 이종찬은 “안기부로 바뀌고 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간 건 참 안타까웠던 일”이라고 회고했습니다. 현대사를 뒤돌아보면 이처럼 탄식이 나오는 지점이 적지 않습니다. 일찍이 증자(曾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出乎爾者, 反乎爾者也).”

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유석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