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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장애인 부모 겨냥한 불안 마케팅"…'탈시설 조례' 귀추 주목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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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조례안 입법예고에 5000건 넘는 찬반 의견

19일 시작하는 임시회에서 시행 2년 만에 존폐 놓고 표결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나온 장애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생활하면서 완전한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에 대하여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지원에 관한 조례(탈시설 조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장애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구체적으로는 지역 정착을 위한 지원 주택과 자립 생활 주택, 활동 지원 서비스와 소득 보장을 위한 공공 일자리 제공을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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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8일 서울 영등포구 63컨벤션센터 앞에서 열린 장애인 차별 철폐의날 기념식을 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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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조례가 만들어진 지 2년 만에 존폐 갈림길에 섰다. 지난달 21일 서울시의회가 조례를 폐지하라는 내용의 주민조례청구를 수리하면서다. 서울시 주민 조례 발안에 관한 조례는 18세 이상 서울시민 2만5000명 이상이 청구권자로서 조례를 제정하거나 개정 또는 폐지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례 폐지안은 19일부터 보름간 이어지는 서울시의회 임시회에서 심의하고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

시의회가 지난 3일부터 7일까지 탈시설 조례 폐지조례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설왕설래가 벌어지고 있다. 시의회는 누리집에서 임시회 심의를 앞두고 주민 의견을 수렴했는데 5620건에 달하는 찬반 의견이 쇄도했다. 서면과 우편, 전자우편(이메일) 등을 통해 접수된 의견까지 합하면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단 한 건의 의견도 게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사안을 둘러싼 대립의 심각성을 가늠할 수 있다.

장애인시설 단체와 장애인 부모회 등은 탈시설이 장애인 돌봄 부담을 키운다며 2022년 조례 제정 때부터 강하게 반대해 왔다. 이들은 조례가 탈시설을 부추기는데, 충분한 준비 없이 이뤄지는 탈시설로 발달장애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부모회 측은 해당 조례로 시설 관련 정책이 약화하고 예산이 줄면 부모들의 돌봄 부담이 커진다며 폐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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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관계자들이 지난 2022년 6월 15일 서울 중구 숭례문에서 서울시의회까지 '탈시설 조례 제정'을 촉구하며 행진을 하던 중 횡단보도에 멈춰 서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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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는 지난해 12월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집회를 열고 탈시설 조례가 ‘무연고 중증장애인을 거주시설에서 내몰게 하는 강제적인 정책’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단체 측은 “거주시설 대기자는 죽어간다”며 “조례를 폐지하고 신규 시설을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장애인 단체 등은 장애인 인권을 위해 조례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장애인을 비자발적으로 시설에 입소시킨 후 지역사회로부터 격리해 장기간 수용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설명이다. 당장 시설에서 나오길 희망하는 장애인을 지원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도 문제다.

이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조례 폐지로 시설 입소가 늘어나고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서울시가 지원 주택이라는 제도를 전국 지자체 가운데 유일하게 운영하며 탈시설 지원책이 조금씩 확산하고 있었는데 이번 계기로 다른 지자체도 탈시설이라는 방향성을 놓고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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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회 전경.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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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선 시설을 소유하고 있는 복지재단과 종교재단 등이 장애인 부모를 앞세워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탈시설 조례로 시설이 위협받는다는 식의 주장으로 부모들의 돌봄 걱정을 부채질한다는 것이다. 서울 소재 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한 활동가는 “한국 복지를 구성해 온 시설 관련 단체들이 사안을 ‘부모의 인권’ 대 ‘장애인의 인권’으로 끌고 간다”며 “평생 장애인 자녀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짐을 짊어진 부모들의 아픔을 부추겨 이슈를 만들려는 전략”이라고 꼬집었다.

시는 탈시설 조례 폐지 여부와 상관없이 관련 정책을 이어간다는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조례가 제정되기 이전인 2009년부터 서울시는 자립지원 정책을 만들어 해 왔다”며 “이는 장애인 권리 측면과 세계적인 추세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설에 대한 지원이 늘어야 한다는 입장도 존중하고 정책에 반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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