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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이슈 세월호 인양 그 후는

“우리 모두는 세월호 가족에게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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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 인터뷰

경향신문

지난 4월 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사무실에서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을 만났다. 유 센터장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유가족들의 곁에 머문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세월호 10주기 공식 기록집 <520번의 금요일>을 포함해 5권의 기록물 발간에 참여했다. 이효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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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 세월호는 하나의 사회운동이었다. 시민들은 아침에 집을 나선 가족이 무사히 집에 돌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종전까지 빠르게 ‘수습’해야 할 일이던 ‘재난’은, 사회가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해 진상을 규명하고 애도해야 할 대상이 됐다. 이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참사 이전까지 평범한 이웃이었던 희생자·생존자의 가족들이다. 그들은 단식과 삭발, 삼보일배와 100일을 넘는 농성도 마다하지 않고 사회의 맨 앞줄에서 ‘안전사회건설’을 촉구해왔다. 이들은 “지겹다”, “뭘 밝혀냈냐”고 말하는 사람들의 몫까지 대신해 싸웠다. “내가 먼저 당했으니 당신들은 당하지 말라”(책 <520번의 금요일> 중 준영 엄마 임영애씨의 말)는 마음이었다. 이들이 앞장서 싸우는 대신 국가에 재난의 수습을 일임했다면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년간 세월호 가족들의 싸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이다. 기록단은 참사 직후부터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가족들의 곁을 찾아 10년을 머물렀다. 역사는 길어지고, 기억은 희미해진 세월호의 10년을 어림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기록단은 거기에 속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기록단의 일원인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을 지난 4월 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월호 참사 이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각종 재난의 피해자들을 연결하고 진상규명, 재발방지 등 피해자들의 마땅한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가가 됐다.

그는 “이태원 참사 직후에 이태원 유가족분들은 사실 세월호 가족들과 거리를 두려 했다. 9년을 싸웠는데 진상규명이 안 됐다고 봤으니까, 우리는 다른 길로 싸워야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이태원 참사 이후 1년 6개월이 지났는데, 지금 이태원 유가족들은 ‘우리가 걸어온 시간은 세월호 가족들이 먼저 간 길에 발걸음을 포개면서 온 거다’라고 말씀하신다. 세월호 가족들은 운동을 만들었다. 다른 재난 참사의 피해자들이 또다시 목소리를 낼 때, 어떻게 하면 과오를 줄이고, 어떻게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지, 그 나침반 역할을 세월호 가족들이 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이전보다 안전해졌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재난에 더 신경 쓰고, 안전 문제에 대해 더 예민한 사회가 됐다고 본다. 세월호 가족들은 진상을 밝혀야 할 일이라는 걸 알렸다. 그렇게 특별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월호 참사는 기존에 발생한 한국사회의 재난과는 달랐던 것 같다.

“기존의 재난·참사는 사회적인 애도나 전국적인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는 전국적 애도 속에서 정부나 국회 등 다양한 공적 기관이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하고 배분한 사건이다. 재난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과 피해자 범주가 확장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재난은 수습의 대상이었다. 시민은 정부의 재난수습을 선전하고, 이의 수용을 설득·계도하는 책무를 맡았다(유해정 논문 ‘정치적 애도를 통한 삶의 재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에서 시민은 구조, 교통정리, 헌혈 등 자원봉사를 통해 처음으로 재난에 참여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에 이르러 ‘애도하는 시민’이 등장했지만, 추모 행렬은 한 달을 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는 달랐다. 시민들은 진도 팽목항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노란 리본을 달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 흐름에 구심점이 된 것은 피해자의 가족들이었다.

-기록단이 올해 3월에 세월호 참사 10주기 공식 기록집 <520번의 금요일>을 펴냈다. 책을 읽고 나니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책임자 처벌만이 아니라 안전사회 건설을 요구했고, ‘안전’을 사회의 열쇳말로 만들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가족협의회(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의 활동을 정리해봤더니 참여하거나 주도했던 행사가 1년에 600~700건에 달했다. 가족협의회에 참여하는 200여 가정의 뜻을 모으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겠나. ‘이렇게 감정 표출하면 안 될 텐데’ 싶을 정도로 회의 때는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또 끝나면 같이 밥 먹으러 갔다. 가족협의회에서 모두가 평등한 한 표를 갖고, 치고받고 싸우면서 결론을 다듬어서 내놓는다. 부모 한 분 한 분이 위대하고 존경스럽지만, 전체가 모여서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수를 만회하는 경험을 만들어 온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더 존경스럽다. 어떤 집단이 이렇게 10년을 할 수 있을까.”

-<520번의 금요일>에서 ‘조직’과 ‘갈등’을 다룬 장을 썼다(이 책은 12개의 장을 6명의 작가가 나눠 썼다). 가족협의회 입장에서는 드러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인데 쓰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가족협의회가 2022년 봄에 10주기를 앞두고 그동안의 기록을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객관적이고 솔직한 백서를 써달라’고 했다. 호성 엄마 정부자님이 ‘평범한 엄마가 10년을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다. 원치 않지만 누군가는 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우리의 부족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줘야, 우리 같은 시행착오를 덜 겪지 않겠느냐. 그러면 우리 백서는 의미가 있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솔직하게 쓰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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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들은 참사 직후 무엇을 믿을 수 있었을까. 언론은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를 냈다. 정부는 세월호 뱃머리가 서서히 물에 잠기는 걸 손 놓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있지도 않은 ‘에어포켓’을 거론하면서 배에 공기를 불어 넣었고, 현장엔 단 2대의 헬기만 떠 있는데도 121대의 헬기가 구조 작업에 투입됐다고 선전했다. 세월호 가족들은 정부가 또 뭘 숨길지 몰라 2015년 8월 진도군 동거차도에 인양 작업을 감시할 천막을 쳤다. 배를 타고 가 낭떠러지를 끼고 산을 올라야 도착하는 천막을 가족들은 1주일씩 돌아가며 3년 넘게 지켰다.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는데 저절로 이뤄진 건 없었다. 가족들이 청와대 항의 방문을 하고 나서야 박근혜 대통령 면담이 이뤄졌고, 국회에서 56시간을 대기하고 나서야 국회 국정조사 계획서가 통과됐다. 전국에서 650만명의 서명을 받고, 46일을 단식하고, 100일 넘게 광화문광장 노숙농성을 벌인 끝에 특별법이 겨우 통과됐다. 외부의 환경과 싸우는 동시에 가족들은 내부의 갈등도 조정해야 했다. 대리기사 폭행 사건처럼 가족들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도 있었고, 정부가 조장한 갈등도 있었다. 정부는 2015년 배·보상 기준을 발표하면서 배·보상 신청자에게는 5000만원의 국비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기로 했다. 대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았다. 이는 가족들이 최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쪽과 현실적으로 먼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별법들 이외에 세월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세월호 이전보다 안전해졌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재난에 더 신경 쓰고, 안전 문제에 대해 더 예민한 사회가 됐다고 본다. 세월호가 처음을 만든 것들도 많다. 재난이라는 건 그전까지 빨리 딛고 일어서는 것이었는데, 진상을 밝혀야 할 일이라는 걸 알렸다. 그렇게 특별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피해 회복의 범주도 넓어졌다. 과거에는 보상금으로 보상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신체로 나타나는 정신적 고통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렸다. 좌초된 배를 3년에 걸쳐 인양한 것도 거의 없던 일이고, 그 배를 보존한 것도 처음이다. 법원에서는 드물게 재난에 대한 국가 책임이 인정됐고, 기무사의 유가족 사찰 등 국가 폭력도 드러냈다. 그렇게 받은 국가배상금을 피해자들이 한 가정당 500만원씩 3억원을 모아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기금으로 모은 것도 처음이다. 국회 농성도, 청와대가 있던 청운동에 진입해 농성을 벌인 것도 처음이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논의될 때 정부·여당의 가장 큰 반대 논거는 세월호였다. ‘세월호를 9번에 걸쳐서 조사했는데 새로운 진상이 밝혀진 게 있었느냐?’는 얘기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애도가 왜 크지 않냐고 묻는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피로감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국가 차원에서 9번 진상규명을 시도했고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했다. ‘밝혀진 게 없지 않으냐’고 말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진상규명을 빼놓고 세월호가 많은 것을 바꿨지만, 진상규명이 너무나 주된 이슈였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처럼 인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진상규명이라는 것이 ‘위법하냐, 위법하지 않느냐’만을 가리는 조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도 세월호를 계기로 알게 됐다. 법 위반만 없으면 검찰은 기소할 수 없고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러나 재난·참사가 일어나는 데는 구조의 문제, 행정상의 공백, 문화적 측면이 모두 작용한다. 이제는 가족분들 사이에서도 ‘법적인 부분만 따져선 안 됐던 거구나, 제도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관행을 바꿔야 했던 부분이구나’라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책임을 묻는 것도 사법적 책임만큼이나 정치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9번의 조사가 밝혀낸 사실은 분명히 있다. 국가가 희생자들을 구조하지 않았다는 것.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지만, 4월 19일에야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바다에 잠긴 선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조 실패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진 정부 관계자는 가장 먼저 사고 해역에 도착했던 해경 123정장 1명에 불과하다.

-기존 진상규명에 대해 아쉬움은 없나.

“저는 다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사에 관해서는 두 가지 얘기를 하고 싶다. 하나는 9번을 조사했다고 하지만 증인들은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불출석했고, 증거는 대통령기록물 등으로 지정돼 접근할 수 없다. 손발 묶어놓고 조사하라고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조사위원회 구성에 대한 아쉬움이다. 여야가 각자 몫을 추천하다 보니 위원들 일부는 각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법적·구조적·문화적 문제를 모두 다루기에는 구성이 법률 전문가들 중심이었다. 실무 조사관들도 각 부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머잖아 복귀할 조직을 철저히 조사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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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7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부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 해경과 해군은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이날 선내 진입은 실패했다.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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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기가 왔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의 수명이 긴 까닭은 뭐라고 보나.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봤다’라는 점이다. 무기력하게 서서히 침몰하는 걸 시민들이 모두 바라봤다. 두 번째는 부모들이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싸웠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부모들은 10년간 후퇴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자리에서 가장 맨 앞으로 나가 싸웠다. 전태일 열사도 사후 몇십 년간 이소선 여사가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가셨기에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균씨도 김미숙 어머님이 모든 산재 현장을 찾아가시기 때문에 산재 문제를 알리는 이름으로 여전히 기억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 있었을까.

“참담하고 슬프지만 어린 자녀들이 희생됐고, 그 수도 너무 많았다. 어떤 때는 매일 농성을 해야 한다. 희생자 가족이 많으니 내가 못 나갈 때 누군가 나가 줄 사람이 있었다. 슬프지만 그게 동력이 됐다. 이태원도 너무 참담하지만, 희생자가 세 자릿수였기에 대신 싸워줄 가족들이 있었다. 이건 희생자가 적으면 길게 싸우기도 어렵고, 사회변화를 요구하기도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모든 피해자분이 재난이 날 때마다 이렇게 싸울 수 있겠나.”

-<520번의 금요일>을 보면 가족분들을 도왔던 시민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지난 10년을 떠올리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가족들을 향한 혐오 발언이었다.

“사람들이 재난 피해자들을 혐오하고 모욕하는 건 그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도 있겠지만, 정치인이나 정부 등 마이크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언론에는 그런 내용이 보도되니까 그게 여론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피해자들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왔다. ‘가족들은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눈물 닦으라고 가제 수건 챙겨준 게 뭐라고’, ‘같이 굶고, 울어준 게 뭐라고’ 이런 식이다. 혐오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사실 실체는 없다. 곁을 지키며 따뜻한 말을 보태는 사람들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가족들이 10년을 버틴 건 만났던 수많은 시민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는 10년 동안 부모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봤다. 안산에 생명안전추모공원 건설을 추진할 때인데 안산 시민들이 너무 반대하니까 시민들 마음을 돌리려고 노인정, 마을회관을 시민들이 선물로 보내준 양파를 들고 찾아다녔다. 한 어머니가 어떤 할머니께 양파를 드렸는데, 그 할머니가 ‘우리 동네에 납골당 들이려고 했냐’며 양파를 이 어머니 뒤통수에 던져버렸다. 어머니가 양파를 다시 할머니 손에 꼭 쥐여주면서 ‘할머니, 저는 욕해도 되는데 이거 드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하더라. 경이로웠다.”

-가족분들이 10·29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세월호 가족분들이 좌절한 국면 중 하나였다. 당시 사참위(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진상조사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못 내고 정리한 직후였는데,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고 가족들이 완전히 꺾였다. 8년 동안 정말 잘 안 울던 부모님들이 이태원 얘기만 하면 울었다. 가족들은 세월호 이후 이만큼밖에 못 이룬 게 속상하지만 사회는 바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년들이 죽는 걸 보면서 가족들이 ‘사회도 못 바꿨구나’, ‘슬퍼하고 애도해 줬던 얼굴들이 떠올라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도 ‘놀러 가다 죽었다’는 혐오의 말이 나왔다. 그래도 그 말이 나올 때까지 시간은 걸렸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에서는 하루 이틀 만에 쏟아졌다. ‘더 잘 싸웠어야 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10년이 끝이 아니다. 앞으로 또 바꿔 나가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재난으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와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안전해지고, 누구든 재난에 맞닥뜨렸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피해를 회복하고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사회는 가족들이 어렵게 한 발 한 발 내디뎌서 온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공로와 기여에 감사하기보다는 마치 특혜를 받으려고 했던 사람들처럼 매도하거나 ‘피해자가 왜 저래’ 하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사회나 정부가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인데, 문제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고민하기보다 세상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피해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피해자가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 왜 피해자가 삼보일배하고 머리를 깎고….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이 바란 건 진상을 알고 싶은 것 하나였다. 이태원 참사 가족들도 진상을 조사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달라고 1년 반을 내달리고, 지금도 집에 못 돌아가고 있다. 매번 진상규명 특별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상설로 조사기구를 만들어서 전문적으로 조사해 통합적인 재발 방지 대책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가족들이 요구하는 게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이다. 기본법에 피해 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제도를 담을 수 있다. 그렇게 조사 인력들의 경험치를 축적하고, 피해자 지원을 조력하는 전문가들도 양성해야 한다. 이런 제도화가 없다면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들 모두가 나와서 싸우는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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