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27 (토)

1만2천명에 휘둘리는 나라, 전공의를 ‘괴물’로 키웠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의정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지난 2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내 전공의 전용공간에 신입 전공의 모집 안내문이 붙어있다. 최근 의정 갈등 속에서 임용을 거부한 인턴들은 이날 상반기 수련을 위한 임용 등록이 끝난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진짜 ‘의료 개혁’ 위한 연속 기고 ④



김명희 | 예방의학 전문의·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



2015년에 발간된 국제노동기구(ILO)의 ‘보건의료 분야 근로 시간 형태와 그 영향’이라는 워킹페이퍼를 위한 한국 실태 조사를 담당했었다. 당시 인터뷰에 참여한 한 전공의는 이렇게 말했다. “당직 다음날 일을 하다 보면 판단이 느려져요. 멍하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느끼고 뭔가 내 동작이 느리다는 것을 느껴요.” 환자단체 대표도 덧붙였다. “중증환자, 암 환자들이나 희귀질환 환자들은 대부분 수련의·전공의들이 치료하잖아요. 근데 졸린 눈이에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거죠.”



2022년 대한전공의협의회 실태 조사에서 전공의들의 주간 평균 근로 시간은 77.7시간이었고, 100시간 이상 근무자도 25퍼센트나 됐다. 2016년에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전공의법)이 제정되면서 주당 80시간이라는 근로시간 한도가 정해졌지만,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왜 이런 상황을 지속할까? 병원의 진료 수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저렴한 인건비로 장시간 써먹을 수 있는 노동력, 게다가 ‘수련’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합리화까지 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지난 2월 하순부터 전공의 1만1900여명이 집단 사직했다. 수련병원들의 타격이 크다. 50개 수련병원의 수입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4238억원(15.9%) 감소했다. ‘빅5’ 병원은 그 타격이 더 커서, 외래 환자가 크게 감소하고 일반병상 가동률도 50~60% 수준으로 떨어졌다. 여러 병원이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 어떤 곳은 직원들에게 무급휴가를 강제했고, 급여를 반납하는 곳, 희망퇴직을 받는 병원도 나타났다. 병원 경영만 걱정되는 것은 아니다. 환자들이 제때 적정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커다란 우려를 낳고 있다. 불과 1만2000명의 작업장 이탈로 국가적 의료 대란이 벌어지고 대형 병원들이 심대한 경영 타격을 입다니, 그동안 어떤 사회 세력도 보여주지 못했던 파괴력이다.



왜 우리 사회가 겨우 1만2000명의 젊은 의사들에게 휘둘려야 하는가? 첫째, 의료 이용이 지나치게 대형병원들로 집중됐고, 둘째, 이들 병원이 지나치게 전공의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빅5 병원 의사 7천여명 중 전공의 비중은 39%에 달한다. 서울대병원처럼 전공의 비중이 46.2%에 달하는 곳도 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10% 남짓에 불과하다. 사람, 돈, 시간을 써서 교육하고 훈련시켜야 할 이들을 그저 값싼 노동력 취급했던 업보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2020년 보건의료인력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수련의와 전공의의 연평균 임금은 전문의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아직 온전한 전문가가 아니라 수련생 신분이기 때문이다. 전공의법에서도 이들이 일하는 시간을 ‘근로시간’이 아니라 ‘수련시간’으로 표현된다. 다른 분야에서 자격과 관련된 대부분의 시간 규정은 최소 투입 기준을 정하는 데 비해, 특이하게 전공의 수련시간 규정은 최대 허용 한도를 정한다. 이는 노동시간 규제를 우회하기 위한 수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전공의들에게 전대미문의 힘을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정부와 병원이다. 수련병원 교수들은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들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착취의 사슬에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해왔다. 문제의 당사자인 병원들은 의-정 갈등의 무고한 피해자 행세를 하며 그 부담을 다른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하고 있다. 수도권의 대학병원들은 2028년까지 수도권 인근에 경쟁적으로 분원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지만, 전공의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기이한 인력 구조를 바꿀 계획은 없다. 이런 상황에 이르도록 의료 체계의 상업화, 시장화를 방치해온 국가의 책임이 지대하다.



늦었지만, 우리 사회가 큰 대가를 치르고 학습했으니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 전공의를 수련시키는 것은 ‘비용’이며 ‘투자’이지 ‘수익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련병원은 전문의를 대폭 늘리고 전공의들에게 ‘피교육생’의 위치를 돌려줘야 한다. 고도의 진료 능력을 보유한 상급종합병원들이 동네의원이나 지역사회병원들과 외래 환자를 두고 경쟁하며 양적 팽창에 몰두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 정부 또한 사회가 필요로하는 전문 인력을 ‘사회적으로’ 양성한다는 의미에서 전공의 교육훈련에 투자하고 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결국 의료 대란의 해법은 의료 공급과 인력양성 체계의 ‘공공성 강화’로 귀결된다.



▶▶세월호10년, 한겨레는 잊지 않겠습니다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