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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ASML 해외 이전 막아라” 네덜란드 ‘베토벤 작전’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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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7일 네덜란드 펠트호번에 위치한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제조기업인 ASML의 간판./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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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가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露光) 장비 제조 기업인 ASML의 해외 이전을 막기 위해 총 25억유로(약 3조7000억원)를 긴급 투입하는 대책을 28일 내놨다. ‘EUV 노광기’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장비다. 설계가 어려워 ASML이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ASML은 매출 기준 네덜란드 9위 기업으로, 본사를 이전할 경우 네덜란드 경제는 막대한 투자·세수 손실을 보게 된다.

네덜란드 남부 에인트호번 인근 펠트호번에 본사가 있는 ASML은 정부의 기반 시설 투자 부족으로 이 지역 기업들이 전력·주택·인력 부족 등을 겪고 있다며 해외 이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특히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이민 제한을 내건 극우 정당이 승리한 후 네덜란드 의회가 고숙련 이주 노동자에 대한 세제 혜택까지 없애 인력난이 가중됐다. 현재 ASML은 네덜란드에 직원 2만3000명을 두고 있고, 이 중 40%가 외국 국적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지역 기반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등 지원책을 담은 ‘베토벤 작전(Operatie Beethoven)’의 세부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ASML과 NXP 등 네덜란드 반도체 기술 기업이 국내에 계속 남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17억유로는 중앙정부가, 8억유로는 지방정부가 부담한다”고 밝혔다. 프로젝트 이름은 악성(樂聖)이라 부르는 네덜란드계 독일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이름을 땄다.

네덜란드는 이 돈으로 ASML 본사가 있는 펠트호번 인근 에인트호번의 주택·교육·교통·전력망 등을 정비하고 확충할 계획이다. 현지 일간 텔레흐라프는 “에인트호번의 물류 시설과 교통 여건 개선, 주택 건설, 지역 내 기술 인력 양성 등이 이뤄진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에인트호번을 지나는 두 고속도로(A2·N2) 확장, 에인트호번 중앙역 확장 공사, 주거 지역인 에인트호번·펠트호번을 오가는 직행 버스 증편, 4만5000가구였던 종전 주택 공급 계획에 2만가구 추가, 지역 고등학교와 대학에 (반도체) 관련 학과 신설 등이다. 네덜란드 내각은 “이번 조치를 통해 ASML이 네덜란드에 계속 투자하고, 법·회계상은 물론 실제 본사를 국내에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며 “만약 ASML의 (본사 유지) 계획이 변경되면 정부의 지원 계획도 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까지 ASML을 붙잡아두려 하는 것은, 본사를 이전할 경우 네덜란드 경제가 상당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ASML의 지난해 총매출은 276억유로로, 네덜란드 국내총생산(GDP)의 약 2.4%를 차지했다. 한 해 동안 낸 세금이 25억7300만유로나 된다. 정부가 ASML을 위해 쓰겠다는 돈보다 1년 동안 낸 세금이 많은 셈이다.

ASML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압도적이다. 대만 TSMC, 삼성전자 등 세계적 반도체 생산 기업은 초미세 공정 반도체 생산에 100% ASML 장비를 쓴다. ‘시한부 총리’인 마르크 뤼터가 이끄는 네덜란드 내각이 긴급 대책을 내놓은 것도 이런 이유다. 네덜란드는 지난해 11월 총선 이후 여전히 새 정부를 구성 중이다. 통상 새 정부 구성 중엔 물러나는 정부가 새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ASML 잡기’가 그만큼 시급하다고 보고 특단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ASML 측은 이날 정부 계획을 환영하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ASML은 “오늘 발표한 계획이 의회의 지지를 받는다면 우리 경영 환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사업 확장과 관련한 최종 결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계속 협력하겠다”고 했다. 한편으론 “우리가 내리려는 결정은 (네덜란드에) 계속 머무를지가 아닌, 어디서 확장할지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사를 꼭 이전하지 않더라도, 네덜란드가 아닌 나라에 장비 공장을 추가로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ASML은 TSMC·삼성전자 등을 고려해 동남아나 한국에 EUV 장비 공장을 건설할지 검토 중이라고 알려졌다.

☞베토벤 작전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이름에서 땄다. ASML이 본사를 네덜란드 밖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기반 시설 등에 25억유로를 투입하는 프로젝트다. ASML이 네덜란드계인 베토벤의 예술성과 맞먹는 독보적 기술력을 지녔다는 의미를 담았다. 베토벤은 독일 본에서 태어나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할아버지가 당시 네덜란드계가 살던 플랑드르 출신이다. 플랑드르는 현재 벨기에 북부 지역으로 네덜란드어 방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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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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