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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66]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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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에서 운명이 기구한 여주인공을 들라면 호소카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를 손꼽을 수 있다. 일단 출생부터 기구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혼노지의 변’으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음에 몰아넣은 배신의 대명사 아케치 미쓰히데이다. 15세에 명문 다이묘인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와 혼인하여 순탄한 삶을 살던 그녀는 출가 4년 만에 부친의 역모 사태로 집안이 한순간에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애처가였던 남편의 결사 옹호로 간신히 연좌 처벌을 면한 그녀는 유배 중에 가톨릭을 접하고 신앙에 귀의한다. ‘가라샤’는 그녀의 세례명이다. 그녀를 둘러싼 비극은 절대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권력 쟁탈전에서 호소카와 가문이 도쿠가와 세력에 가담하자, 이에야스의 대항마 격인 이시다 미쓰나리가 다다오키의 처자를 인질로 붙잡으려 한 것이다.

남편에게 짐이 되기 싫었던 가라샤는 도주할 길이 막히자 죽음을 택했다. 가톨릭 교리를 어기고 자살할 수 없었기에 가신에게 자기 가슴을 창으로 찌르라고 명하고, 시신도 저택과 함께 불타버렸다는 스토리가 전해진다. 배신자의 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탄압을 무릅쓰고 신앙을 이어가다가 결국은 정쟁의 희생양으로 맞이한 비장한 죽음이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남겼다는 시조로도 유명하다. “져야 할 때를 알아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고 사람도 사람인 것을(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호소카와 가문의 후계자이자 한국 도자기 애호가로도 알려진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는 환갑이 되었을 때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은퇴 회견에서 그는 이 시조를 읊었다. 조상의 비극적 유언이 후손에게는 ‘아름다운 퇴장’을 장식하는 미사(美辭)가 된 셈이니 그 감흥이 더욱 특별한 듯하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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