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지구얼굴 바꾼 인종주의> 저자]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동아시아의 식민지, 점령지에서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연행해 일본군의 성노예로 부렸다. 이른바 종군위안부다. 그것은 무수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 까닭에 일본은 1993년 관방성 장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하야양평)의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과했었다. 이른바 고노담화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는 일본의 태도가 돌변했다. 종군위안부의 강제연행을 부인하더니 이제는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2023년부터는 교과서에서도 '종군위안부'를 삭제하고 '위안부'로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자발적 매춘행위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까닭에 역사왜곡을 넘어선 역사날조다.
그 문제의 심각성은 일본이 자라는 세대에게 학교교육을 통해 한국이 역사를 왜곡해서 일본, 일본인을 폄하한다는 허위인식을 주입시킨다는 사실이다. 그 같은 제도교육은 한국, 한국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필연적으로 조장한다. 그것은 양국의 위정자들이 말하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역행하는 처사다.
바람직한 관계정립은 역사적 진실을 토대로 하는 반성과 사과 위에서 이뤄진다. 그 점에서 언론인 김영호(<지구얼굴 바꾼 인종주의> 저자)가 아래와 같은 연재물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⑴ 포르투갈에 소녀들 팔아 조총 산 일본영주들
⑵ 국가가 관리한 종군위안부 원조 '가라유키상'
⑶ 외화벌이 매춘사업, 국치로 여겨 숨기는 일본
⑷ 종군 위안부의 역사 지으려는 일본의 안간힘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매춘영업을 관리한 전통을 가진 나라로서 인신매매의 역사가 길다. 16세기 후반부터 봉건영주들이 전비조달을 위해 경쟁적으로 여자노예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에게 팔아넘겼고 그들은 거의 해외에서 매춘의 삶을 살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 흑선의 압력에 의해 개방의 문을 열었다. 사코쿠(鎖國-쇄국)시대의 종막을 내린 일본은 일본인들이 해외로 가는 곳마다 소녀들을 데려가서 매춘부 노릇을 시켰는데 그들을 '가라유키상'이라고 불렀다.
태평양 전쟁을 벌인 일본은 사실상 정부 차원에서 종군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정부가 나서 원정 성매매를 지원하고 관리했다는 소리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미국 점령군의 성범죄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특수단체를 앞세워 매춘사업을 관리하고 지원했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외화벌이라는 실상이 드러난다.
일본의 여자노예 수출역사는 센코쿠(戰國-전국, 1467~1573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일본은 봉건영주들이 할거하던 시대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비는 주로 포로와 노예를 팔아 조달했다. 그런데 1543년 조총을 가진 포르투갈인 3명이 탄 중국 정크선이 일본해안에 표류해 왔다. 그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포르투갈과 교역의 문을 연 일본은 소녀노예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에게 팔아 조총을 샀다.
시세는 100kg 들이 화약상자 1개에 여자 10명꼴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쟁상과 전쟁기간을 미뤄보면 노예거래 규모가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을 듯하다. 그 때 포르투갈은 일본여자들을 리스본까지 데려가서 매음굴에 팔아넘겼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아메리카로 끌고 가서 파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선도한 데 이어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에 걸쳐 노예유통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일본은 포르투갈이 포교하는 카톨릭이 국가안보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1639년 모든 포르투갈인의 축출을 단행했다. 그 때부터 1854년 미국의 흑선이 내항하여 개방의 문을 열 때까지 일본은 사코쿠(鎖國-쇄국)시대를 살았다. 그 기간에는 네덜란드가 유일하게 데지마라는 인공섬에 주재하며 일본의 대외거래를 전담했으나 포교활동은 하지 않았다.
일본어에는 ‘唐行きさん’(가라유키상)이란 말이 있다. 일본어 사전은 1800년대 후반, 그러니까 흑선내항 이후에 규슈(九州-구주)의 아마쿠사(天草-천초)제도 부근에서 돈을 벌려고 해외로 나갔던 일본여성을 말하는데 대개 매춘부로 일했다고 설명한다. 어원을 따져보면 '唐'(당)은 '당나라'를 뜻하니 중국을 가리키고 '行'(행)은 '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唐行'(당행)은 중국에 간다는 의미다.
옛날에야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으레 중국이니 '唐行'이란 말을 썼을 테지만 그 뜻은 해외로 나간다는 소리다. 'きさん'은 부모가 의절한 자식이 어버이의 허락을 받아 집에 돌아온다는 뜻을 지녔다. 글자 풀이대로 19세기 후반기에서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많은 젊은 일본여자들이 몸을 팔아 돈을 벌려고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갔다. 그들 중에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했지만 말이다.
규슈지방에서도 나가사키(長崎-장기), 구마모토(熊本-웅본) 출신들이 많았다. 규수지방은 외래문물이 들어오던 입구이기도 했지만 많은 노예들이 팔려 나가던 출구였다. 뚜쟁이격인 제겐(女衒-여현)이라는 거간꾼들이 농어촌을 돌아다니면서 가라유키상을 모집했다. 그들은 어린 딸을 가진 가난한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해외에 나가면 돈을 많이 번다고 딸을 꼬드기고 부모에게는 돈을 미끼로 부추겼다.
더러는 7살짜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부모들을 설득하면서 공적임무로 해외에 나간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부모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 선지급금이라고 해서 몸값을 쳐주고 부모한테서 딸을 거간꾼의 처분에 맡긴다는 약정서를 받아냈다. 뚜쟁이 손에 들어간 딸은 포주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거개가 돈을 번다니 따라 나섰지만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몰랐다.
▲ 사이공 가라유키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우표와 사이공의 도장이 찍혀있다.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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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선에 몸을 맡기고 원행 길에 올랐던 그들은 거의 14~16세였다. 너저분한 화물선 밑창에 갇힌 그들에게 한쪽 구석에서는 창녀 노릇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쳤다. 금전거래와 계약서가 있었으나 몸을 판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 따지면 취업사기이자 인신매매였다. 그들의 행선지는 만주, 홍콩, 필리핀, 싱가포르, 타일랜드,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수마트라, 인도의 카라치, 뭄이 등 주로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다.
또 상하이 등 서방열강의 중국 조차지, 조선에도 많이 팔려나갔다. 더러는 멀리 미국의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아프리카 동해안의 탄자니아, 잔지바르에까지도 퍼져나갔다. 그들이 팔려간 곳은 일본정부의 허가를 받아 운영하던 매춘시설인 유곽(遊廓)이었다.
1860년대 러시아의 극동지역과 바이칼 호의 동부에 있던 일본인 거류민촌은 매춘부와 상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에서는 그들이 군사정보 수집임무를 수행했으니 일본이 러시아와의 일전을 일찍부터 벼르고 있었음을 짐작 한다. 그들은 또 청-일전쟁, 노-일전쟁, 시베리아 원정에 참전하는 일본군을 따라 다니며 종군 위안부 노릇을 했다.
노-일전쟁(1904~1905년)이 터지자 일본군 수십만 명이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진군하는 한편 한성에는 사단병력이 주둔했다, 그 때 일본군의 진주와 함께 일본의 공창시설인 유곽도 상륙했다. 그 유곽이 한성에는 오늘날 장충단 공원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일장기를 휘날리고 있었다. 장충단은 을미사변, 임오군란으로 순사한 충신, 열사를 모시던 제단이어서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
1908년쯤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본인 거류민촌에는 매춘부들이 다수를 차지했었다. 일본이 1932년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파견하는 가라유키상은 따로 자격시험을 거친 다음에 선발했다. 그때 일본은 중-일전쟁(1937~1945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1년 일본이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하기 이전에는 프랑스 군인들이 그곳 일본 유곽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때 그들은 고객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벌였었다.
그 즈음 싱가포르에서도 가라유키상들이 첩보활동을 하며 영국군의 정보를 빼내 일본에 넘겼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연승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의 활약이 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외화벌이의 첨병이자 최전선에서 뛰는 첩보요원이었다. 1872~1940년 많은 일본 매춘부들이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에도 거주했었다.
호주에는 일본 매춘부가 1887년 처음 나타났다. 호주 동부-서부의 금광에 팔려간 일본 매춘부들은 주로 중국인 광부들을 상대로 매춘 했었다. 북부의 사탕수수 농장, 진주 양식장, 광산에서는 고객이 주로 태평양 군도 출신의 원주민, 말레지아인, 중국인들이었다.
호주에서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인들이 일본인 매춘부들을 데리고 살림을 차렸다. 그때 여자를 데리고 해외로 나간 중국인은 거의 없었다. 그 즈음 중국에서는 여자들을 전족(纏足)이라고 해서 어릴 적부터 엄지발가락을 뺀 나머지 발가락들을 발바닥으로 접어 헝겊으로 동여매어 키웠다. 그 때문에 발이 기형적으로 자라 제대로 걷지 못해 원행을 떠나지 못했다.
1890~1894년 일본여자 3222명이 싱가포르에 입국했는데 그들 중에서 상당수는 호주를 비롯한 딴 나라로 옮겼다.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를 거쳐 호주에 입국하는 일본여자들에게는 유색인을 상대로 매춘영업을 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졌다. 1890년대 호주는 매춘부로 일한다는 조건을 달아 일본여자의 입국을 허용했다. 1880년대 말기부터 1900년대 초기에 호주에는 수백 명의 일본여자들이 유곽에서 일하고 있었다.
1896년 들어서는 일본정부가 정책을 바꿔 매춘부의 출국을 금지했으나 해외에서는 여전히 매춘영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거꾸로 많은 외국 여성들이 부자나라 일본에 들어가 성매매 유흥업소에 종사하고 있다. 일본은 그들을 '재팬'(Japan)에 '가라유키상'을 더해 '쟈파유키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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