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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귀신은 살아 있는 사람을 못 이긴다…‘파묘’ 600만 흥행 굿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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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파묘. 씨네21


*<파묘>와 <곡성>의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묘지 속의 다이묘는 꼭 모습을 드러내야 했을까. <파묘>를 두고 이어지는 설왕설래에서 아마 가장 자주 다뤄지는 질문일 것이다. 혹자는 <곡성>(2016)처럼 적의 존재를 끝까지 미지로 남겼어야 했다며 <파묘>의 서사구조를 비판하고, <사바하>(2019)의 김제석(유지태)을 다룬 방식과 같이 다이묘의 전사가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어야 한다면서 전작보다 못한 차기작이라고 평한다. 또 어딘가에선 장르물이 너무 애국과 반일 코드에 기댄 것 아니냐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여하간 팬과 안티팬을 모두 미치게 만드는 게 스타의 자질이란 말마따나 <파묘>가 아주 오랜만에 한국영화계에 논쟁적인 공론장을 펼쳤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이럴 땐 여기도 옳고 저기도 옳다는 양시론을 취하기보단 어느 한쪽에 조심스레 무게를 얹어보고 싶은 것이 모든 관객의 욕망일 테다. 이 글 역시 <파묘>에 다이묘의 실체가 일찍이 등장해야 마땅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형 오컬트 영화의 적자인 <파묘>가 최근 한국영화의 한계까지 극복했음을 말해보려는 시도다.





망자보단 생자에게, 한국형 오컬트의 무게중심





다이묘의 직접적 등장을 비판하는 의견 중 하나는 이 선택이 ‘오컬트 영화’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오컬트 영화에 기대했던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쫄깃함이 부족하다는 논리에서 <곡성> 과 자주 비교되는 상황이다. 지금 여기서 <곡성> 과 <파묘>를 시시콜콜 비교할 필요는 없겠으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있다. <곡성>은 한국형 오컬트 영화보단 미스터리 수사물에 가깝다.



<곡성>은 최종적으로 종구(곽도원)의 딸 효진(김환희)을 괴롭히는 범인이 외지인(구니무라 준) 이냐 무명(천우희)이냐의 문제로 좁혀지는 이야기였다. 이에 관객은 종구의 시점에 따라 겉보기에 모호해 보이는 단서들을 재구성하며 일광(황정민)의 굿이 외지인과의 협업이었다는 등의 사실을 수사하고자 했다. 즉 <곡성>의 중심은 <차이나타운>(1974), <세븐>(1995), <살인의 추억>(2003>, <조디악>(2007)처럼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혼돈 앞에 무력해진 형사의 초상이었다. 그러니 악귀가 등장한다는 표면적 공통점에 의해서만 <파묘>와 <곡성>을 나란히 두고 저울질하는 건 마땅치 않아 보인다. 두 영화의 방향성은 명백히 다르다.



<파묘>는 <곡성>보다 더 진한 ‘한국형 오컬트 영화’이며 오컬트를 대하는 자세도 당연히 다르다. 한국의 오컬트는 무척이나 인간 중심적인 소재다. 한국 오컬트 영화의 중요한 토대인 1980년대의 토속영화를 살피면 명확해진다. 하명중의 <태>나 이두용의 <피막> <뽕> 등 전통적 무속신앙을 주요 소재로 다뤘던 토속영화에서 무당은 대개 마을의 정치세력과 결탁한 인물로 묘사된다. 신비함의 대상이나 비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속세와 아주 가깝게 밀접해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무속신앙에 얽힌 오컬트적 힘의 근원을 파헤치는 일이 토속영화의 목적은 아니었다. 종교 세력이 정치에 녹아들며 무고하게 희생된 민중들, 특히 여성의 잔혹사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그리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한겨레

영화 <곡성>.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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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현 감독이 밝혔듯 한국의 무당과 굿은 귀신을 죽이는 일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승을 떠도는 귀신의 한을 풀어주거나 그것들을 잠시 묶어두는 일이 무속신앙의 주된 역할이다. 이른바 구마나 퇴마로 불리며 귀신을 잡는 일은 한국의 오컬트와 거리가 멀다. 한국형 오컬트란 신비의 영역을 다루되 문제의 근원과 해결책을 산 사람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21세기 이후 한국형 오컬트 영화의 적절한 사례로는 <시실리 2km>(2004)를 언급할 만하다. 조폭 양이(임창정)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송이(임은경)의 한을 풀어주고 송이의 무덤에 제사를 올리며 무당으로서의 책무를 끝내는 이야기였다. 조폭 코미디처럼 보이던 이야기가 중간부터 확 전환하면서 한국 무속신앙의 본질을 적절히 드러낸 경우였다. 영화 중반부터 다이묘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낸 <파묘>의 선택도 귀신 송이를 영화 중반부터 대놓고 등장시켰던 <시실리 2km>와 유사하다.

한국 사회에 통용되는 장례식이나 제사, 혹은 파묘 등의 제의란 결국 산 사람이 편하게 살고자 벌이는 일에 가깝다. 한국형 오컬트 영화의 목적도 비슷하다. 망자가 왜 이승에 한을 남겼는지, 이승에서 겪었던 문제가 무엇인지, 그렇다면 그들의 한을 달랠 방법이 무엇인지 고찰하는 과정은 산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반면교사의 단서가 된다. 한국 오컬트 영화의 무게중심은 망자가 아닌 생자에게 기울어져 있어야 한다. <파묘>의 초반부에서 할머니의 틀니를 숨겨놨던 손자를 보며 지금 내곁에 있는 가족과 부모에게 더 잘해야겠단 생각이 들면 그것이 바로 한국형 제의의 뿌리 깊은 함의다.



<파묘>는 애초부터 파묘라는 한국적 제의를 다루는 작품이다. 다이묘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그것에 얽힌 진실을 밝히거나 그것의 존재감을 부각하려는 미스터리 스릴러 수사물이 아니다. 감상의 초점은 상덕(최민식)을 비롯한 네 주인공에게 맞춰져야 한다. <곡성>의 시작은 낚시 중인 외지인(악마)의 모습이었고, <검은 사제들>은 타국의 악마가 한국에 오게 된 경위부터 밝혔다. <사바하> 역시 오컬트적 존재로 의심되는 ‘그것’의 탄생부터 이야기를 펼쳤다.



반면에 <파묘>는 사람부터 다룬다. 무당과 풍수사란 직업을 소개하는 화림(김고은)과 상덕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비행기 바깥의 빛이 화림과 봉길(이도현)에게 묻고, 관의 시점에서 상덕과 영근(유해진)의 얼굴이 보인다. 생자에게 집중하겠단 영화의 방향성을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연출이다.





평범한 전문가들이 지탱하는 사회





산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따지는 일이 <파묘>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망자들의 사연이나 오컬트적 존재의 정체는 촉매제일 뿐이다.



친일파 귀신이나 다이묘의 전사, 그들의 역사적 맥락이나 상징을 하나하나 엮어가는 진실 게임은 <파묘>의 본질과 다소 엇나간 일이다. 신과 귀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나 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의 관념적 고민을 <파묘>에서 찾는 일은 오독에 가깝다. 친일파 조상을 숨기려는 후안무치의 자손들, 죽어서도 이승에 욕망을 흩뿌리는 친일파 귀신의 행태를 보며 상덕을 비롯한 네 주인공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가 <파묘>의 중핵이다.



이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파묘>의 서사가 왜 “허리가 끊겨 양분”(이동진 평론가)되어야 했는지도 포용할 수 있다. 이야기의 변곡점은 아래와 같은 상덕의 심리적 변화로 이해해야 자연스럽다.



상덕은 영화 내내 자신을 “땅 파서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라 말하며 “직업윤리”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비 오는 날 화장한다 해도 본인에겐 별문제가 없겠으나 망자와 자손들의 안녕을 위해 화장을 중단하기까지 한다. 동시에 상덕은 딸의 결혼을 앞둔 아버지이기도 하다. 상덕이 지닌 삶의 목적은 풍수사로서 자손들에게 적절한 유산을 남겨주는 일이다.



달리 보면 친일파 귀신이 생전에 지녔던 목적도 비슷할 수 있겠다. 시류에 편승하여 자손들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준 사회인이 바로 친일파 귀신의 정체였다. 소명 의식 없는 안온한 직업적 태도와 편협한 개인주의가 합쳐졌을 때 생긴 악의 평범성이 드러났다.



망자로부터의 가르침에 생자 상덕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끝에 ‘풍수사로서의 직업윤리를 제대로 수행하며 가족을 지켜야 한다’라는 다짐이 찾아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즉 친일파 귀신이 중심이 된 <파묘>의 전반부는 다소 맥 빠지는 맥거핀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 변화에 꼭 필요한 과정이다.



한겨레

영화 <검은 사제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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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귀신의 일로 단단해진 상덕의 직업윤리를 다이묘의 등장 배경으로 삼으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결도 편해진다. “우리 땅을 지켜야 한다”라며 다시금 묘를 파려는 상덕의 심적 변화는 영화 속에 분명히 그 여지를 남겼다. 다이묘의 등장에 지나치게 몰두하느라 다소 간과된 부분일 뿐이다.



상덕은 친일파 조상에 빙의된 장손의 경례와 보국사 창고에 남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직접 마주한 인물이다. 이 대목에서 상덕이 커다란 역사적 대의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보단 그때의 독립운동가들이 국토의 등줄기에 박힌 쇠 말뚝을 빼려 했다는 사실에 집착한다. 자신이 했던 말대로 “이제 한국에 좋은 땅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안타까움의 객관적 이유를 파악해버린 셈이다. 이때 상덕이 느낀 주요한 감정적 동력은 풍수사로서의 소명 의식이다.



등장인물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왜 하필 후반부에 일본 정령이 필요했는지도 파악하기 쉽다. 거대한 상징이나 역사적 맥락까지 고심할 소요까진 없다. 친일파 할아버지 같은 한국산 귀신이야 상덕과 화림이 평소에 상대하던 것들이다. 적당히 달래거나 적당히 화장하여 해결할 수 있는 어려움이다.



반면에 다이묘 정령은 주변에 오는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존재다. 어느 직업이든지 평소의 업무와 다른 난제 앞에서 혁신적인 대책을 내놓기란 쉽지 않다. 친일파 귀신의 관을 몰래 열었던 병원 직원처럼 대개의 사회 구성원은 각자의 양심을 조금씩 어기고 본인의 능력 안에서 적당히 사는 편에 가깝다. 의뢰비의 액수나 파묘의 위험성을 따지던 영화 초반부의 상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친일파 귀신을 만나며 자신의 직업윤리를 고심한 상덕은 다이묘와 맞서기를 강하게 주장한다. 요컨대 <파묘>는 풍수사와 무당을 비롯한 사회 각기의 직업인들이 점차 선의 평범성을 지켜가는 일종의 시민 도덕극에 가까워 보인다.



시민 도덕극의 틀 안에서 인물들의 행위를 따르다 보면 다이묘와의 최후 결전도 더 부드럽게 받아들여진다. 오행 이론에 따라 다이묘를 물리칠 때 상덕은 내레이션을 통해 그 원리를 설명한다. 다소 편의적이고 설명적인 연출이라며 불편함을 표하는 의견도 잦다.



그러나 이 불편함 역시 영화의 감정선에 조금 더 주목하면 해소될 법하다. 반복해 말하자면 <파묘>의 시작은 화림과 상덕의 내레이션이었다. 각자의 직업의 식을 아주 명백하게 발화하는 둘의 자부심이 극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화림은 일전의 경험으로 배운 바에 따라 다이묘를 현혹한다. 상덕은 아주 열심히 삽질하며 거친 노동에 힘쓴다. 그리고 이들은 외부의 도움이나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전문 지식을 적절히 활용해 업무를 마치는 데 성공한다.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의 직업의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존중하는 멋진 수미상관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유연함과 확장성





2023년 <씨네21>이 진행한 한국 여름영화 비평 <사바하> 대담에서 지적된 것은 근래의 한국영화가 “각자도생의 전문가주의”(김병규 평론가)를 공통으로 다뤘단 점이었다. 정부와 공동체의 방만 속에서 사회의 난점을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한국의 세태가 반영된 지점이다.



국가는 자신의 잇속을 위해 전문가들을 편의적으로 소비하고(<더 문>), 버려지거나 죽어가는 국민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이들이 전문가가 되어 구해야 했다(<비공식작전> <밀수>). 혹은 <콘트리트 유토피아>처럼 폐허가 된 세계에서 개인들은 각자의 생존에만 몰두해야 했다.



위 작품들은 이러한 사회적 어려움에서도 각자의 대책을 강구하며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다만 뚜렷한 시대적 난점이 사회의 거울인 일련의 대중 영화에 반복되어 드러났다는 사실에 다소 애석할 뿐이었다.



영화 속의 문제만은 아니다. 툭하면 반복되는 특정 직업에의 혐오와 갈등은 멀리 있지 않은 일상의 뉴스다. 무력감과 패배감만 짙어지는 이 상황을 <파묘>는 정면 돌파한다. 어쩌면 현실 사회를 거꾸로 투영한 “시대착오와 비약”(김신 평론가)일 수도 있겠다.



평범한 전문가들이 ‘우리 땅’을 지킨다는 일종의 공동체적 전문가주의를 새로운 희망으로 제시한 것이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혹은 지나친 개인주의 프레임에 갇히는 쪽이 아니다. 단지 상덕이 자기 딸을, 화림이 봉길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다는 사적 욕망이 점차 퍼지며 공동체 전반의 상생으로 이어지는 형국을 보여줬다.



<1987>(2017)이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처럼 등장인물들의 올곧은 직업의식은 그 욕망의 건전한 기반이 된다. 영화는 이 직업의식을 존중하며 영화의 초점을 완전히 그들에게 맞춰준다. 한국형 오컬트의 구조는 이 도덕적 재고를 적절히 펼치기 위한 좋은 틀이었다. 작금의 문제를 망자(과거)에게서 찾는 경로를 통하면서 영화의 장르적 재미까지 챙기는 일거양득의 전략을 취했다.



오컬트 영화의 영역을 적절히 넓힌 순간 영화의 내외부는 더 풍성해졌다. 하나의 진실을 위한 이야기의 복무는 없어지고, 저마다의 직업윤리를 고민하며 사는 평범한 전문가들의 일상성이 자리 잡을 여백이 생겼다. 영근이 무덤 속의 물건을 슬쩍 훔치거나, 화림과 봉길이 헬스클럽에 다니거나, 인물들이 보국사나 병원이나 영근의 가게에서 밥을 먹는다거나, 상덕이 피 흐르는 배를 부여잡는 사소한 행위의 순간들은 다이묘의 정체와 무관하게 피어난 캐릭터의 생동감이다.



굿판의 화림이 컨버스를 신는다거나 봉길이 에어팟 맥스를 끼고 있는 등의 설정도 마찬가지다. 만약 <파묘>가 귀신의 존재나 신의 의미를 묻는 거창한 진실 게임에만 몰두했다면 인물들의 자잘한 설정은 어색하고 이상하게만 느껴졌을 테다.



대신 <파묘>는 모든 장면의 의미를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고, 상징 하나하나를 공식처럼 다루지 않으며 그것의 무게에 짓밟히지도 않는다. 자그마한 일상적 순간들의 돌출을 수렴하고 세세한 설정의 자유로움을 보장한다. ‘웰메이드’란 집착 아래 매끄럽게만 진행되던 최근의 일부 한국영화에 없던 빈틈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화림이 일본에 가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나 주인공 넷이 3년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상덕의 딸이 왜 하필 독일 사람과 결혼했는지 등에 대한 각자의 추측이 영화 바깥으로 뻗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 귀신이 진짜 있는거야?’ 라든지 ‘그래서 누가 범인이었던 거야?’라는 양자택일의 질문으로 휘발되지 않는 넓고 다양한 파장이 극장가를 감돌고 있다. 하나의 영화에 하나의 정답만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많은 목소리와 호기심이 떠도는 현상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이우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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