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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세계가 러 예술 퇴출하는데...서울 무대 오르는 푸틴 측근 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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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달 내한 공연 앞둔 자하로바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스타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45)가 내달 17~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앞둔 작품은 ‘모댄스(Modanse)’. 프랑스어로 패션(Mode)과 춤(Danse)을 합친 말이다. 세계 패션의 아이콘 코코 샤넬의 일대기로, 자하로바는 볼쇼이발레단 무용수 20명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티켓 값은 12만~34만원. 지난해 내한한 파리오페라발레의 ‘지젤’과 같은 역대 최고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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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일대기를 다룬 발레 '모댄스' 공연을 앞둔 러시아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볼쇼이발레단 무용수들이 샤넬 의상 80여 벌을 입고 춤춘다. /인아츠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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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반도 병합 찬성, 푸틴 지지

자하로바는 러시아 발레를 대표하는 발레리나.세계 최고 발레단인 마린스키발레의 발레학교 바가노바를 사상 최초로 2년 월반했고, 17세에 마린스키에 입단해 바로 다음 해 수석무용수가 됐다. 지금은 볼쇼이 수석무용수이자, 이탈리아 라스칼라의 객원 에투알(수석무용수)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지지 서명에 동참했고, 푸틴 대통령을 지지한다. 푸틴의 집권 통합러시아당 당원으로 연방의원을 지냈으며, 국가예술위 위원으로 일한다. 한정호 공연평론가는 “자하로바는 푸틴의 문화계 최측근으로, 푸틴 지지 입장을 굽히지 않아 서방에서 퇴출된 뒤 작년 12월 볼쇼이 극장 총감독에 오른 클래식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뒤를 이어 차기 볼쇼이 극장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자하로바는 지난해 러시아 예술가들의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에도 불참했다. 이 성명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러시아 내 일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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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조국 공헌 훈장'을 받고 있는 자하로바. /타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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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외교문제 우려”

공연기획사 인아츠프로덕션은 “전쟁 전인 2019~20년 공연을 추진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연기됐던 것”이라며 “자하로바는 명시적으로 전쟁을 지지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 발레리나도 나이가 들고, 지금이 아니면 우리 관객은 이 아름다운 공연을 끝내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예술의전당은 “워낙 인지도 높고 예술성도 높이 평가받은 작품이어서 대관 결정에 큰 논란은 없었다. 국제정치적 문제는 고려되지 않았다”고 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뒤, 서방에선 러시아 예술가들의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다.<그래픽> 모스크바타임스가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의 예술을 상태로 철의 장막을 치고 있다”고 비난하고, 푸틴이 직접 나서 비판했을 정도. 지금 명시적으로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지 않는 러시아 예술가가 공연할 수 있는 나라는 두바이와 중국, 예외적으로 일본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하로바가 볼쇼이 무용수들과 함께하는 공연이 서울에선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꼭 지금 이 공연을 올려야 하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장광열 무용평론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시의성 있는 공연이 아니라면, 러시아 정계와 연계된 예술가의 내한 공연은 적절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된다”고 지적했다. 한정호 평론가는 “러시아가 대러 제재에 동참한 우리나라를 비우호 국가로 지정해 우리 예술가들의 러시아 공연은 대부분 막혀 있는데, 자하로바만 국내에서 공연하는 건 상호주의 원칙에도 맞지 않다”며 “공연이 강행되면 국내 우크라이나인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외교적으로 문제 삼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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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백형선


◇”예술은 예술로 봐야” 주장도

발레리나 출신인 정옥희 무용연구가는 “예술과 정치의 경계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이슈다. 정치적 혼란기에 활동하는 예술가는 물론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딜레마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예술과 정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지만, 예술이 정치로 환원되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하로바는 2018년 카타르 방송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정책에 대한 입장을 질문 받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죽어가는 아이들, 헤어지는 가족이 없게 하는 것”이라며 “나는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만의 닫힌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러시아 예술가들은 푸틴에게 반대하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침묵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연을 취소하는 건 쉽지만,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러시아 최고의 발레와 연극을 보고 문학 작품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이 그들과 연대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 생각은 다르다. 2013년 자하로바가 자신이 졸업한 키이우 무용학교 보수를 도우려 볼쇼이 극장 자선 공연 행사로 기금을 모아 보내려 했지만, 학교 측은 이를 거부했다. “자하로바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찬성했다. 그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걸 잊은 듯하지만, 우리는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푸틴을 지지하는 러시아 발레리나의 한국 공연은 용인될 수 있을까. 공연은 이제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우크라이나 북서부 루츠크에서 태어난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리나. 별명이 ‘차리나(Tzarina·차르+발레리나)’다. 2008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연방의회(두마) 의원(2007~11)을 지냈으며, 2018년 이후 국가문화예술위 위원을 맡고 있다. 2013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에 찬성했고, 푸틴의 통합러시아당 당원이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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