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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5 (월)

파리지엥들이 줄 서서 사는 빵, 셰프는 연세대 물리학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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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플랑’ 대회서 1위 차지한 ‘밀레앙’ 서용상 셰프

조선일보

서용상 셰프가 자신이 직접 만든 프랑스 식 타르트 '플랑(Flan)'을 들어보이고 있다. /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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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프랑스 플랑 대회 때예요. 제품을 출품하고 4일쯤 지났나, 협회에서 등수는 말해주지 않고 20등 안에 들었으니 시상식장에 오라고 하더라고요. 가서 수상자들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있는데 마지막 2명이 남을 때까지 제 이름이 안 불리는 겁니다. 마지막 ‘우승자’에서 제 이름이 불렸는데, 그 순간 주변이 잠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어요. 저만 아시아인이었거든요(웃음).”

프랑스에선 해마다 바게뜨와 크루아상, 그리고 정통 프랑스 디저트 플랑(Flan) 부문에서 최고를 뽑는 대회를 연다. 파리 6구에 있는 빵집 ‘밀레앙(Mille & Un)’을 운영하는 서용상 수석 파티시에 겸 셰프는 2023년 플랑 부문에서 1등상인 ‘플랑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현지 유명 파티시에들을 모두 제치고 최고 상을 받은 것이다. 파리에서도 큰 화제를 모은 ‘사건’이었다. 그는 앞서 ‘르 그레니에(Le Grenier a Pain)’라는 빵집에서 일하던 2013년 8월에도 ‘프랑스 베스트 바게트 톱10′ 중 8위를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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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상 셰프가 자신이 직접 만든 프랑스 식 타르트 '플랑(Flan)'을 들어보이고 있다. /장련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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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셰프가 운영하는 밀레앙은 서 셰프의 수상 이전에도 파리 현지 거주자들이 아침부터 바게트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맛집으로 소문났던 곳이다. 수상 이후 손님이 더욱 몰리면서, 플랑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후에는 제품 주문량이 6배 가량 늘었다. 프랑스 유명 배우 및 정치가, 관료들까지 ‘밀레앙’ 빵을 구입하고 그 후기를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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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앙(Mille&Un)'의 서용상 셰프가 만든 프랑스 식 타르트 '플랑(Flan)'. 서 셰프는 2023년 2023년 플랑 부문에서 1등상인 ‘플랑 그랑프리’를 받았다. 정통 파리지엥들도 받기 힘든 상을 아시아인이 수상했다는 사실에 현지에선 큰 화제가 됐다. /'밀레앙'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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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식품관 ‘스위트파크’에 이 서 셰프가 운영하는 빵집 ‘밀레앙’이 입점했다. 서 셰프는 “빈손으로 프랑스 파리로 떠났는데, 이렇게 한국에 거꾸로 베이커리를 역수출하게 돼 감회가 새롭다”며 빙그레 웃었다.

신학을 공부하던 남자, 빵 굽기에 미치다

서 셰프는 본래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철학·신학을 공부하면서 목사를 꿈꿨으나, 길을 틀어 파티시에가 됐다. 서 셰프는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다닐 때면 늘 동틀 무렵부터 빵을 구워 내놓는 빵집 한 곳을 지나치게 됐다. 그 빵 굽는 냄새를 맡으면서 어느 날 ‘나 역시 이렇게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양식을 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2000년 서울 김영모제과점에 취직해 1년 가량 일을 하면서 빵을 배웠다.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하다가, 새벽 6시부터 밤 10시~12시까지 하루종일 밀가루를 나르고 반죽을 만드는 고된 노동을 하는 삶을 살게 됐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고 했다. “나이 서른쯤에 갑자기 진로를 바꿨으니, 힘들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죠. 그저 몰입했고 그 덕에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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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지난 2009년 이후 15년 만에 식품관 리뉴얼을 단행하면서 디저트 전문관 ‘스위트 파크’를 가장 먼저 공개했다. 디저트파크에 입점한 디저트 브랜드는 총 43개. 베이커리 ‘밀레앙'은 이중에서도 바게뜨와 플랑으로 유명하다. /밀레앙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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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쯤 일하고 나니 해외로 가서 더 넓은 제빵의 세계를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빵집에 먼저 취직, 비자 문제로 10개월 가량을 2주에 한번씩 한국을 오가면서 일했다. 2002년 9월엔 아내와 3살, 4살짜리 아들과 딸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맨땅에 헤딩’ 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서씨는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만 해도 아내는 매일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정도로 처음엔 생계를 꾸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루브르 박물관도 못 가본 ‘성실한’ 파리의 제빵사

3년 동안 제과 전문가 교육 과정을 거치고 취직한 곳이 파리에서도 바게뜨 대회 1등상을 거머쥔 빵집으로 유명한 르 그레니에(Le Grenier a Pain)였다. 서 셰프는 “노는 날에도 쉰 적은 거의 없다. 회사에서 부르면 쉬다가도 무조건 나갔다. 그 덕분에 나중엔 아예 라파예트 지점을 운영하게 됐다”고 했다.

일 밖에 모르는 나날이었다. 파리에서 20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루브르 박물관에 가본 적이 없다는 서 셰프다. 빵 중에서도 특히 바게뜨와 크로아상에 몰두했다. 파리 서민들에겐 주식과도 같은 빵이어서다. 보통 파리 제과점에선 바게뜨를 하루 4번 정도 내놓는지만, 서용상 셰프는 7번을 만들어서 내놨다. 남들보다 두 배 가량 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데도 고집했다. 빵의 신선함을 위해서였다. 매일 팔리지 않는 빵은 모두 폐기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이 집 바게뜨가 제일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2013년엔 파리 최고 바게뜨 대회에서 8등으로 입상했다. 서 셰프는 “파리 바게뜨 대회에서 상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만든 바게뜨를 출품해놓고도 ‘아 오늘은 뭔가 잘 안 된 것 같아서 상 타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그쯤에 ‘8등을 했다’는 연락이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엔 크로아상 대회에도 도전하겠다”

2019년 3월엔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베이커리 매장 ‘밀레앙’을 몽파르나스 타워 인근에 냈다. 서 셰프는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빵집이라는 이유로 사실 처음엔 외면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새벽마다 빵을 빚고 일했다. 5년쯤 지났을까, 동네 사람들이 바게뜨와 크로아상을 사기 위해 매일 줄을 서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했다.

‘플랑’ 대회에 도전하게 된 것도 동네 고객들의 격려 덕분이다. “이곳 플랑은 맛이 특별하다”는 손님 반응을 보고 새로운 플랑을 개발, 2023년 전국 플랑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따냈다. 서 셰프는 “한국의 맛을 보여주기 위해 플레인맛 외에도 흑임자 맛을 개발했다”고 했다. 지금도 파리 ‘밀레앙’에선 한국식 빙수와 꽈배기도 판매한다.

서 셰프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인이 만드는 빵의 저력을 파리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플랑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이젠 다른 대회에도 다시 나가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크로아상 대회에도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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