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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토)

“남편 간병하는 중에도 연필 놓지 않았다” 만학도 553명의 늦깎이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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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난 27일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김기업씨가 교실에서 졸업장을 보이고 있다. 87세인 김씨는 중학교 과정 최고령 졸업생이다. /김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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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 눈이 잘 안 보여서 공부를 더 못한다는 게 아쉬워요”

지난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일성여자중·고교 졸업식에 참석한 만학도 김기업(87)씨는 4년 간의 공부 끝에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 소감을 밝히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김씨가 졸업한 일성여자중·고교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40~80대 여성들이 재학 중인 2년제 평생학교다.

김씨는 이날 중학교 과정을 졸업하는 학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양쪽 눈에 백내장 수술을 받고 허리 디스크로 다리 한쪽에 마비 증상이 나타났지만 ‘그토록 바랐던 공부이니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김씨는 “손자들이 풀다 만 문제집을 돋보기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며 공부했다”며 “몸이 받쳐줄 때 공부를 했다면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고 했다.

이날 중학교 294명, 고등학교 239명 총 533명의 졸업생이 한복을 차려입고 강당을 가득 메웠다. 학교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졸업식에 참석한 졸업생의 90% 이상은 60대 이상이다. 한 졸업생은 허리가 굽어 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졸업장을 받았다. 이선재 교장은 이날 졸업식에서 “원래라면 40~50년 전에 했을 졸업을 이제라도 포기하지 않고 해낸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졸업생 대표가 “자식들이 가져온 서류에 적어낼 학력이 없다는 게 가슴 아팠다”고 하자, 희끗한 머리에 얼굴엔 주름이 진 한 졸업생은 입고있던 한복 저고리로 눈물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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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일성여자중고교 졸업식에서 만학도들이 이선재 교장선생님께 하트를 보내고 있다. 2024.2.27/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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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군에 사는 졸업생 성옥자(73)씨는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하루 왕복 5시간씩 경의중앙선 전철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성씨는 지난 23일 본지와 만나 “새벽 6시 반 집에서 출발해 오후 4시 반이 넘어 귀가하면 하루가 다 갔다. 처음 입학했을 땐 그만두고 싶기도 했다”며 “하지만 통학 시간을 한자를 외우며 보낸 덕에 이제 뉴스에서 들리는 사자성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다니는 대신 일찍부터 양장점에서 일했다는 성씨는 “3월이면 숭의여대 패션디자인학과 새내기가 된다”며 “양장점 근무 경력을 살려 의류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과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학업 생활을 이어갔다는 이정분(66)씨도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이날 졸업식에 참석했다. 이씨의 남편은 이씨가 학교에 입학한 2020년 림프종 투병 생활을 시작한 뒤 2년 간의 투병 끝에 2022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씨는 “남편과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새벽잠을 줄여가며 하루 2시간씩을 공부한 끝에 마침내 졸업을 하게됐다”며 “사별한 남편도 하늘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남편의 응원 덕분에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아들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아버지 간병을 하라’고 했지만 남편이 ‘나는 괜찮으니 고등학교부터 졸업하라’며 응원해줬다”고 했다. 그는 “상태가 많이 나빠진 이후에도 남편은 전혀 아픈 내색없이 ‘열심히 공부하라’며 저를 응원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백석예대 실버케어비즈니스과에 새내기로 입학할 예정인 이씨는 “어머니께서는 ‘내가 아프다고 공부를 그만두면 안 된다’며 저를 응원해주신다”며 “대학에 가면 좋아하는 역사 공부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김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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