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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신진서, 중국 바둑 ‘올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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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승으로 농심배 4년 연속 우승

신진서의 ‘원맨쇼’가 끝났다. 세계 1인자가 바둑사(史) 한 페이지를 새로 썼다. 한·중·일 3국 국가 대항 연승전인 농심배는 25회째인 올해 다시 한번 한국에 해피엔딩을 선사했다. 4년 연속 우승이다.

조선일보

신진서(오른쪽)가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한·중·일 3국 국가 대항 연승전인 농심배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다. 왼쪽은 홍민표 감독. /한국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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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중국 상하이 그랜드센트럴 호텔 대국장. 신진서(24)는 막판 가슴 철렁한 순간을 겪었다. 무난하게 우세를 유지해 가다가 갑자기 우중앙 일대서 난조에 빠졌던 것. 그러나 이를 가까스로 헤치고 나왔고, 흑의 249번째 착점을 바라보던 중국 팀 최후의 보루 구쯔하오(26)가 시계를 눌러 항복 선언을 했다. 신진서는 최종 3라운드를 5전 전승으로 장식하면서 이창호의 2005년 ‘상하이 대첩’을 19년 만에 재현했다. 그때도 무대는 농심배였다. 지난해 12월 4일 부산서 열린 2라운드 최종전 승리를 포함하면 신진서 연승 횟수는 6으로 늘어난다. 이창호와 신진서가 6회와 22회 대회서 한 번씩 작성한 마무리 5연승 기록을 이번에 갈아치웠다.

신진서가 한국 4번 주자 박정환(31)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았을 때 한국 팀이 쌓은 승수는 제로(0)였다. 설현준, 변상일, 원성진, 박정환 등 1~4번 주자가 1승도 못 올린 탓이다. 마지막 주자 신진서가 나머지 여섯 판을 전승해야 우승이 가능했다. 6연승의 산술적 확률은 1.56%.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둑에서 연승이 어려운 건 휴식 없이 연일 출전, 푹 쉬고 나온 상대를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 장소는 중국 선수들 홈그라운드 상하이. 객지에서 싸우는 신진서로선 체력 부담 등 여러 면에서 크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신진서는 난국을 영리하게 돌파했다. ‘한입’에 6승을 다 털어넣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 판, 한 판에 집중하는 ‘살라미 전술’로 임했다. 컨디션 조절도 완벽했다. 동행한 홍민표 대표팀 감독은 “불안해하는 기색을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차분함에 오히려 중국 선수들이 부담감에 짓눌리다 일패도지(一敗塗地)했다. 특정국 선수 5명이 다른 팀 1명에게 모두 진 건 이 대회 사상 처음이다. “혼자 중국 14억명을 눕힌 셈”이란 말까지 나온다.

신진서는 기술적으로도 한 단계 올라선 경지를 보여주었다. 전현직 세계 우승자가 즐비한 중국 선수들 대부분이 100수도 채 못 채우고 AI(인공지능) 예측 승률에서 한 자릿수로 추락하곤 했다. 이희성 9단은 “수읽기가 끝을 모를 정도로 깊어졌다”고 놀라워했다.

준비성도 남다르다. 23일 구쯔하오전 초반엔 전날 홍민표 감독과 함께 연구했던 포석이 등장했다. 그는 대국 상대에 따라 맞춤 전략으로 임하는 성실함으로도 유명하다. 전날 딩하오전 역시 준비한 변화가 나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한국이 이번 대회서 기록한 전적 6승 4패 중 6승은 신진서가 홀로 따냈다. 4패는 나머지 4명 패수(敗數) 합계다. 중국 성적표도 흥미롭다. 총 7승 4패 중 7승은 선봉장 셰얼하오 혼자 따냈고, 그를 포함한 중국 선수 5명 전원이 신진서에게 무릎을 꿇었다.

다만 한국 바둑에서 신진서가 워낙 발군이다 보니 ‘신진서 의존증’이 고착화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농심배만 보더라도 4년 연속 신진서가 매조지를 해 우승이 가능했다. 연승 방식 대회에서 최종 주자의 1승은 무엇보다 값지다. 22~25회 대회 4년간 신진서가 마지막 주자를 맡아 쌓아올린 승수가 16연승에 달한다. 이 역시 농심배 최고 기록이다.

신진서 올해 전적은 19승 1패. 승률이 95%에 이른다. 2개 국제대회(LG배·잉씨배) 포함 현역 8관왕이다. 2012년 프로 진입 후 통산 승률은 79.0%(783승 208패). 외국 기사 상대 승률은 75.8%(270승 86패)를 기록 중이다. 한국은 16회째 우승으로 5억원 상금을 챙겼다. 중국과 일본은 각각 8회, 1회 우승했다.

신진서는 “큰 판을 이겨 뿌듯하다. 첫 판을 둘 때만 해도 먼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6연승까지 하게 돼 영광”이라면서 “컨디션엔 문제가 없었다. 대국하면서 우승을 생각하다 막판 좋지 못한 바둑을 두었는데 정신을 바짝 차려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 바둑계도 신진서에게만큼은 고개를 숙이는 분위기다. 절대 강자에 대해선 외경(畏敬)심이 강한 특성이 반영됐다는 지적이다. 과거에도 이창호에게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 바 있다. 대회 기간 동안 상하이 바둑 팬들이 신진서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선 장면이 자주 있었고, 대회가 끝나자 참패한 중국 선수들에게 대한 성토가 인터넷을 달구기 시작했다. 이 역시 20여 년 전 이창호 전성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이홍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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