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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빨갛게 눌러쓴 이름… 이유를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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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아버지가 남긴 수첩의 비밀

애틋한 기록인가, 저주인가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해결을 못 보고, 온라인에서 꼭 잘잘못을 따지려 드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며칠 전에 본 게시물도 그러했습니다. 아내와 싸우고 와서는 누가 맞느냐고 물어보는 글이었죠. 읽어보니 꽤 흥미로웠는데, 여러분도 한번 판단해보시지요. 내용은 이러합니다.

“결혼하고 짐을 합치는 과정에서 옛 물건들을 정리하게 됐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유품인 수첩이 나와서 감상에 젖었습니다. 아내에게도 이 수첩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일단 우리 아버지는 지독한 악필입니다. 국민학교 겨우 졸업하시고 평생 시장통에서 일만 하시던 분이라, 한글은 뒤늦게 우리 큰형한테 배운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저 대신 전화를 받아서 쪽지에 메모를 했는데,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악필이라 제가 곤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생각 없이 아버지께 짜증을 냈는데, 그게 너무 죄송합니다. 그게 뭐라고 말입니다 참. 큰형한테 듣기로는 아버지가 저 때문에 필기 연습도 하셨답니다. 지금도 죄송합니다.

아무튼, 우리 아버지는 가난하고 못 배우셨지만 성실하셨습니다. 단순히 시장통의 잡일을 도맡아 하시느라 평소 무시도 많이 당하셨지만, 언제나 웃으며 열심히 일하셨기에 인정도 많이 받으셨죠.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시장 상인분들이 정말 많이 찾아오셨습니다. 전 그게 아버지가 훌륭한 삶을 산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과 아버지는 정말 각별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 정리를 하며 찾은 그 수첩에 그분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글씨 연습을 할 때 가장 먼저 가까운 그분들 이름을 연습한 겁니다.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저는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아내에게 수첩을 보여주며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아내 표정이 이상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그러더군요. 이름을 다 빨간색으로 썼다고요. 그게 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겁니다. 참나. 그러니까 아내 말은, 우리 아버지가 남한테 죽으라고 저주하며 빨간색으로 이름을 썼다는 거죠.

어이가 없어서 두고 봤더니, 아내는 신나서 막 떠들더군요. 글씨 연습을 할 거면 이름만 쓸 이유가 없다, 꾹꾹 눌러쓴 자국이 보이는 게 분노 때문이다, 글씨 연습이라기에는 계속 망가진다…. 듣자 하니 저도 화가 나더군요. 몇 마디 쏘아댔더니 아내도 기분이 나쁜지 틀린 말 했냐며 성을 내는데, 이 상황에서 지금 아내가 화를 내는 게 맞는 겁니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한번 물어보라기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도 그렇습니까? 이건 그냥 누가 봐도 아내가 선 넘은 거 아닙니까? 저희 부부가 같이 확인할 예정이니 댓글 달아주세요.”

보통 이런 글은 글쓴이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솔직히 아내 쪽 생각이 맞아 보이더군요. 다름 아니라, 시장통에서 평소 무시를 많이 당하셨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제 생각을 댓글로 달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아버님께서 일부러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신 것 같습니다. 아마 시장통에서 무시당할 때마다 빨간색으로 이름을 쓴 게 아니실지요? 특정 이름이 자주 나온다면 더 확실할 것 같고 말입니다. 아버지 일이라 객관적으로 못 보는 면이 있을 텐데, 한발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아내 분의 주장이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아버님에게는 그 수첩이 아마 분출구 아니었을까요? 아버님께 실망할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면이니, 아버지가 힘들 때마다 그렇게 화를 삭이셨다고 생각하고 이해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다만 아내 분의 배려가 좀 모자라긴 했네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남편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이 원만히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제 댓글에 사람들이 공감했는지 ‘좋아요’도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다른 분들도 몇 가지 이유로 저와 비슷한 댓글을 다시더군요. 그중 인상 깊었던 댓글은, 글쓴이도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아니냐는 댓글이었습니다. 공감이 가더군요. 부모님의 안 좋은 면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건 자식들의 본능이니까요.

물론 글쓴이의 생각대로 아내가 잘못했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빨간펜밖에 없으면 그걸로 쓸 수도 있는 거지 뭐 어떠냐고 말입니다. 댓글들이 계속 달리니까, 저는 그 게시물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봤습니다. 그 와중에 제 댓글이 가장 많은 공감을 받았는데, 얼마 뒤 글쓴이가 제게 화를 내며 댓글을 달았습니다.

‘당신 말대로 우리 아버지가 누군가를 저주하며 빨간색으로 이름을 쓴 거면, 그 수첩에 내 이름이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까지 저주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살짝 소름이 돋았습니다. 차마 거기에는 다시 댓글을 달지 못하겠더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동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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