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동기획
설 연휴를 하루 앞둔 8일 서울시 중구 서울역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귀성열차에 올라타고 있다. 정효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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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40대 중에 하나 선택하고 끝까지 응답해 주세요. 50대·60대는 끝났다고 합니다. 오늘 많이 올 테니 꼭 받아주세요.”
지난달 한 정당의 총선 공천 과정에서 당원 A씨가 예비후보자 B씨 등 50여명이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단체방에 올린 메시지다. B씨가 공천에서 유리하도록 당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에 연령대를 속여 응답하도록 한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여심위)는 이달 초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A씨를 검찰에 고발했다. 공천을 위한 경선 여론조사는 선거법에 따라 규제를 받는다.
총선을 앞두고 표심 파악, 공천 점수화, 언론사 보도 등을 위한 선거여론조사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여론조사를 악용하려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여론조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수요도 많아지고 조사 전화에 피로감을 느끼는 유권자의 응답 거부가 많아지는 악순환도 나타나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관리 강화, 여론조사 의존 정치권 문화 개선 등의 대책이 제기된다. 경향신문은 14일 여심위와 함께 선거여론조사의 실태를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짚어봤다.
선거여론조사, 대선 기준 5년 만에 1.57배 증가
최근 선거여론조사는 실시 횟수가 너무 많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온라인상에는 이번 설 연휴 기간에도 쉴 새 없이 여론조사 전화가 오는 통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얘기가 많았다. 포털 검색창에 여론조사라는 단어만 쳐도 ‘여론조사 전화 차단’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완성된다. 이동통신사는 유권자의 휴대전화 번호를 여론조사기관에 제공하는데 최근 여론조사가 많아지면서 이동통신 3사 가입자들의 가상번호 제공 거부 요청이 증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실제로 선거여론조사는 늘어나는 추세다. 선거일 전 13개월을 기준으로 2017년 대선 당시 801건에 불과했던 여론조사(공표용) 수는 2022년 대선에서 1385건으로 1.57배 증가했다. 총선은 2020년 1589건이었고 이번 총선의 경우 지난 13일까지 894건이 실시됐다. 이는 여론조사기관이 늘어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여론조사기관은 여심위 등록제가 도입된 2017년 5월 60개에서 2018년 79개, 2021년 84개, 2022년 91개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여론조사 횟수가 늘어난 원인으로는 높은 활용도가 꼽힌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여론조사 단일화를 이룬 이래 여론조사는 중요 국면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돼왔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본격적인 공천에 앞서 지난달 22일부터 25일까지,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여론조사를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천 기준을 정하기 전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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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 피로감 증가···악용 사례도 늘어
문제는 무분별한 여론조사가 유권자의 피로감을 가중하고 응답률을 낮춘다는 데 있다. 응답률이 낮아질수록 조사 품질에 대한 의구심은 높아진다. 선거여론조사의 응답률과 정확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응답률이 지나치게 낮은 경우 대표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돼왔다.
여론조사 수요가 많아지면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업체가 난립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여심위는 이번 총선 과정에서도 한 여론조사기관이 일부 휴대전화 가상번호를 가족과 지인 명의의 실제 휴대전화 번호로 교체·사용한 사례를 확인했다. 이는 공직선거법 108조 선거여론조사기준 위반으로 여심위에서 과태료 3000만원을 부과했다.
일부 정당 혹은 정치인이 여론조사업체와 담합하는 경우도 횡행한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여심위가 없었을 때는 일종의 ‘주문생산’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최근에는 여론조사업체가 하나의 종합 에이전시 기능을 하면서 선거를 기획하기도 한다. 홍보물 배포와 패키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다든지, 선거의 영역 중 하나로 자리 잡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선거여론조사 범죄는 2020년 총선에서 117건, 2022년 대선에서 58건, 2022년 지방선거에서 107건 발생했다. 대표적인 위반 유형으로는 조사결과 왜곡·조작, 당내 경선시 거짓 중복응답 유도, 공표·보도시 준수사항 위반 등이 있다. 선관위 관계자는 “전국단위인 대선에 비해 총선은 다수의 선거구가 있고 지역별 정치상황 등이 복잡해 위반행위가 더 많다”고 전했다.
선거여론조사 주요 현황.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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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심위 관리 감독 강화 필요성···정치권 책임 있는 태도 요구돼
여론조사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여론조사기관의 등록요건을 엄격하게 관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 해당 역할은 여심위에서 맡고 있다. 지난해 7월에도 선관위는 공직선거관리 규칙을 개정해 분석전문인력 수(1명→3명), 상근 직원 수(3명→5명), 연간 매출액(5000만원→1억원) 등 등록 요건을 상향 조정했다.
선거여론조사 범죄 예방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조치도 요구된다. 여심위는 이번 총선에서 법 위반 행위 35건 중 21건을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적발했다. 신고·제보를 통한 적발 건수는 14건이다. 선거법에 따르면 중대 선거여론조사범죄 신고자에게 최대 5억원의 포상금이 지급된다는 점에서 홍보와 관심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이 통계 방식 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 여론조사 업체 관계자는 “지금도 등록 요건이 강화됐는데 여론조사 신뢰도가 올라간 것 같지는 않다”며 “업체들도 각자의 직업윤리를 갖고 하고 있다. 여론조사의 신뢰도가 낮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현행 등록 요건 중 매출액 등 기준은 후발주자의 진입을 가로막고 편법을 동원하면 우회가 가능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정치권과 언론 등 여론조사를 의뢰하는 주체의 책임 있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김헌태 매시스컨설팅 대표 컨설턴트는 지난해 7월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여론조사를 정치권에서 단일화나 공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나라가 한국 외에는 거의 없다”며 “당원들이 요구하는 정책을 가장 잘 구현하는 후보를 선출해야지, 질 것 같다고 후보를 바꾸면 안 된다”고 말했다.
여심위는 “선거여론조사기준을 제·개정해 여론조사를 엄격하게 관리·감독하겠다”며 “조사방법 개선을 위한 연구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총선에 대해서는 “여론조사 실시 신고서를 제대로 심사해 특정 후보 편향 질문 구성 등으로 인한 편향성 비리를 예방하겠다”며 “주요 위반 혐의 인지시 자료제출 요구 등 조사권을 적극 행사하겠다”고 전했다.
문광호 기자 moonli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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