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6일 무죄가 선고되자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동관 358호 중법정을 빠져나와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흰색 마스크에 짙은 회색 양복, 은회색 넥타이를 매고 출석한 양 전 원장은 이날이 공교롭게도 자신의 만 76세 생일이었다. 대법원장 시절 항상 단정한 모습으로 다녔지만, 5년간의 재판에 지친 듯 머리카락은 다소 헝클어지고 주름이 늘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어느 때보다 홀가분함과 기쁨이 느껴졌다. 양 전 대법원장과 달리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기자들의 질문에도 아무 말 없이 빠르게 법원을 벗어났다. 함께 재판을 받고, 함께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시간, 다른 출입구로 흩어져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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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1일 구속기소 이후 5년 만에 마무리된 이 사건은 선고에만 총 4시간 27분이 걸렸다. 재판장 이종민 부장판사는 선고 첫머리에 “판결 이유 설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며 “오늘 일과 중 마칠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 설명 도중 휴정할 수도 있다”고 이례적으로 밝혔다. 이 부장판사가 법대 위에 올려둔 70~80㎝ 두께의 서류도 장시간의 선고가 될 것을 짐작케 했다.
이 부장판사는 4시간 넘게 빠른 속도로 별도로 준비해 둔 선고문을 읽어내려갔다. 크게는 30개, 세부 혐의까지 따지면 47개 혐의에 대한 이 사건의 선고를 위해 재판부는 PPT 자료를 미리 준비해 법정에 들어왔다. 로마자로 각 공소사실에 대한 순번을 붙이고 각각의 혐의가 직권인지, 직권 남용인지,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인지, 공모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지를 O,X로 따져가며 설명을 써넣었다. 4시간 넘게 선고문을 읽던 이 부장판사는 말미엔 지친 듯 종종 이마를 짚기도 했다.
양 전 원장과 고·박 전 대법관은 선고가 이어지는 내내 가만히 눈을 깔고 표정도, 자세변화도 없이 묵묵히 선고를 들었다. 이따금 양 전 원장이 미간을 찌푸리는 등의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오후 4시 10분부터 10분간 휴정 시간을 갖자, 양 전 원장은 변호인과 대화하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때까지 선고된 모든 혐의에 대해 이 부장판사는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힌 상태였다. 이후로도 2시간 넘게 이어진 선고 끝에 “주문. 피고인들은 각 무죄”를 듣자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청석에선 짧게 작은 감탄이 일었다.
이날 법정에는 임성근·유해용·신광렬 전 부장판사 등 전직 법관들도 방청석에 앉아 선고를 지켜봤다. 이들은 사법농단 사태에 휘말려 재판을 받고 무죄가 확정됐지만 결국 법복을 벗고 법원을 떠난 사람들이다. 재판에 앞서 이들은 “잘 지내셨느냐”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고 전 대법관은 휴정 시간에 자신들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기도 했다.
오후 6시 27분 이 부장판사가 마침내 “오랜 기간 재판에 출석하신 피고인들께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하며 법정을 떠나자, 고 전 대법관은 변호인에게 다가가 등을 얼싸안기도 했다. ‘최초의 사법부 수장 구속기소’로 나라 전체를 들썩거리게 했던 검찰은 26일 ‘피고인 3명 모두 무죄’를 받아든 뒤 “판결의 사실인정과 법리판단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는 짤막한 입장만 밝혔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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