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동물이고, 자기말에 무조건 예!하라네요"
"지게차가 스스로 굴러와서는 나를 치었다는데"
"많이 다쳐도 점심시간 돼야 병원 갈수 있어요"
네팔 노동자가 일했던 채소농장의 기숙사 |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 "31세인 사장의 처남은 우리가 동물 같고, 원숭이처럼 보인다고 하고, 휴게시간이 아닌데 화장실에 간다는 이유로 욕설을 퍼붓곤 했습니다. 일을 빨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주노동자를 바닥에 쓰러트리고 발로 짓밟기도 했습니다."
한국인 관리자 중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이렇게 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인 사장이 직접 지게차를 운전하다 이주노동자를 치는 사고를 내고는 근로복지공단에는 지게차가 스스로 굴러가서 사고를 냈다고 거짓 신고를 하는 일도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오전 중에 작업을 하다 심하게 다치더라도 점심시간이 돼서야 병원에 가는 일도 있다. 사업주가 자리 이탈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하다 일어난 사고이니 사업주 측이 병원에 데려가고 치료비를 내주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이주 노동자에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약국에 가서 붕대와 약을 사다 주고는 병원에는 가지 말라고 하는 사업주도 있다.
김달성 포천 이주노동자센터 대표는 "한국의 농업, 제조업, 어업은 이주노동자들 없이 돌아갈 수 없다"면서 "그들에 대한 인권침해는 국가가 사업주에게 절대군주 같은 권력을 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 허가 없이는 직장을 옮길 수도 없고, 취업 연장도 불가능하다"면서 "이들을 노예로 만드는 고용허가제는 개정돼야 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청주고,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한 뒤 서울 동작구 사당동, 봉천동, 인천 등에서 빈민, 노동자들을 위한 목회 활동을 했다. 6년 전부터는 포천 이주노동자센터 대표로서 이주 노동자들을 돕고 있다.
◇ "사장이 사고 경위를 조작했어요"
(필리핀 출신 30대 이주노동자)
지게차 사고를 당한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
나는 지금 필리핀 고향에서 살고 있다.
나는 2015년 한국에서 일하고 싶은 꿈을 갖고 한국어능력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장남으로서 동생들 학비를 대고 부모님을 돕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다.
나는 그해 5월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업했다. 그 회사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특히 수당을 많이 떼어먹었다. 연장 수당이나 야간 수당 등에 대한 임금 할증은 없었다.
최악의 사건은 2020년 1월에 일어났다. 사장이 작업장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다가 나의 발을 치었다. 급하게 후진하다가 나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발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사장은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치료비를 모두 제공하고, 치료받는 동안 월급도 지급하겠다고 했다. 산재보상보험 신청도 해준다고 했다. 취업 기간이 끝난 뒤에는 재입국해 취업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사장의 말을 믿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지게차 사고를 당한 필리핀 이주노동자 |
사장의 그런 약속은 거짓말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에 거짓 보고도 했다. 자신이 지게차를 잘못 운전해 노동자를 다치게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게차가 스스로 굴러가 노동자를 치었다고 했다.
나는 김달성 목사의 도움으로 다시 산재 신청을 했다. 사고 경위를 사실대로 기록한 서류를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하자 사장이 펄펄 뛰었다.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다시 걷기까지 1년이 걸렸다. 2021년 3월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사장은 내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일할 기회를 박탈했다.
◇ "휴게시간이 아닌 때에 화장실 간다고 욕하네요"
(31세 과장에게 괴롭힘을 당한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
"너희는 원숭이 같다"는 욕설을 들었던 방글라데시 노동자 |
2011년 나는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한 기계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24세로 한국에 막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어도 잘 못했고, 한국의 법도 몰랐기에 공장에서 당한 비인도적인 학대를 견디며 지냈다.
그 공장에는 31세의 과장이 있었다. 사장의 처남이었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을 학대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해댔다. 뺨을 때리는 등의 폭행까지 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던지기까지 했다. 겨울철 영하 18도의 한파에도 실외에서 일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어느 날 과장은 한 동료 이주노동자의 작업 속도가 느리다며 작업장 바닥에 그를 쓰러트리고는 발로 차며 짓밟았다.
사고를 당해 깁스를 한 방글라데시 노동자 |
그 과장은 항상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을 빨리하라며 다그쳤다.
그러면서 그는 "개새끼" 등과 같은 욕을 했고, 손에 있는 쇠 연장 같은 것을 던지기도 했다.
우리가 항의라도 하면 그는 "말대꾸하지 말라"면서 더 때렸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무조건 오직 예! 라고만 대답하라"고 했다.
우리는 동물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너희들은 동물 같다. 원숭이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런 모욕은 물리적인 폭력이나 고문보다 더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내가 휴게시간이 아닌 때에 화장실에 가고 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과장은 나를 사무실로 불러 욕을 하기도 했다. 참다못한 한국인 반장이 항의하자 그는 반장 부부를 해고했다. 반장 부부는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반장이 항의하면서 과장에게 한 말은 "왜 외국인노동자를 때리느냐. 외국인노동자도 사람이다. 그들은 동물이 아니다."였다.
이주노동자 사업자변경 자유 보장 촉구 오체투지 |
나는 한국에서 여러 번 산재 사고를 만났다.
한번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 오른손을 많이 다쳤다. 수십 바늘을 꿰맬 정도였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홀로 힘들게 병원을 다녔다. 손을 다쳤으니 요리를 할 수 없어 굶는 날도 있었다. 그때 나는 산재를 신청하려 했지만 사장은 그걸 막았다.
두 달이 지나 또 사고가 났다. 이번에는 철 바구니로 말미암아 오른쪽 무릎 밑이 찢어졌다. 혼자서 병원에 다니면서 일을 계속 해야 했다. 치료비는 내가 냈다.
몇 달 뒤에 또 산재를 당했다. 이번에는 동료 노동자의 손에 있던 35㎏의 실린더가 떨어지면서 나의 오른발을 강타했다. 새끼발가락이 깨졌다. 오전 10시에 다쳤는데 병원에 간 시간은 점심시간인 낮12시 30분이었다. 병원에 빨리 가지 못한 것은 반장이 계속 일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는 나 혼자 갔고, 치료비도 내가 냈다.
내가 일을 못하는 동안 회사는 기본급만 지급했다. 그리고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출근하라고 했다. 치료할 시간을 더 달라고 하면 심한 욕설이 날아왔다. 회사의 이사라는 사람은 기숙사 방에까지 찾아와 화를 내며 방에 있는 물건을 발로 차기도 했다. 빨리 출근해서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산재가 많이 발생했는데, 10명이 해야 할 일을 5명이 했기 때문이다. 수출도 많이 하는 부자 회사인데, 지옥보다 더 심한 여건이었다. 사장, 이사, 반장은 이주노동자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
(트랙터 사고로 허리 이하 마비가 온 네팔 청년)
트랙터 사고를 당한 네팔 청년이 한국에 오기 전 찍은 사진 |
나는 2016년 네팔에서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에 진학하려고 카트만두에 갔으나 졸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기에 한국에 가기로 했다.
고용노동부는 나를 강원도의 한 과수원으로 보냈다. 2018년 12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사장은 트랙터로 비료를 살포하라고 했다. 나는 트랙터를 운전할 줄 몰랐고, 그런 내용은 근로계약서에도 없었다.
사장은 나를 트랙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트랙터를 운전하라고 요구했고,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사장은 트랙터의 운전석에 앉히고는 운전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았다. 겁이 났으나 사장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의 지시에 따라 운전하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대로 나는 트랙터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경험도 없고 연습 시간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어코 사고가 났다. 트랙터가 뒤집어지면서 내 허리를 타격했다. 몸이 둘로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허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트랙터 사고를 당한 네팔 노동자 |
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느꼈다.
얼마 후 119구급차가 왔다. 병원에 가는 동안 나는 의식을 잃었다. 몸의 절반, 허리 아래로 마비가 왔다. 수술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조금 회복이 됐다.
치료비가 많이 나왔다. 내가 일하던 농장은 소속 근로자가 5명이 안 돼서 산재보상보험도 없었다. 치료비는 내가 직접 지불해야 했는데, 통장에는 한 달 분량의 월급밖에 없었다.
사장은 나를 입원시킨 다음부터는 치료비를 전혀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네팔로 돌아가라는 말만 계속했다.
긴 치료 끝에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됐다.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농장주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했지만, 돈을 받지는 못했다.
나는 2020년 9월 다리를 절며 네팔로 돌아왔다. 지금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다. 나는 한국에 가서 장애인이 됐다.
◇ "한달에 한번도 쉬지 못하기도"
(비가 새는 움막 기숙사에서 살았던 네팔 노동자)
숙소 밖 외국인노동자 화장실 |
나는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시골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이었다. 공부에 열정이 있었던 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나서 고등학교 공부를 하러 카트만두에 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카트만두에서 취업하고 싶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취업해 일을 많이 해도 돈을 적게 벌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나는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오고 싶었다. 나중에 네팔로 돌아와 농장이나 공장을 지은 뒤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다.
한국에서 나는 포천의 채소농장에 들어갔다. 그때가 2017년 3월이었다. 처음에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졌지만, 일하는 시간이 길어 고통스러웠다.
트랙터도 운전해야 했다. 농약 뿌리는 일도 했는데, 농장주는 마스크도 주지 않았다.
네팔 노동자가 일했던 겨울철 채소농장 |
겨울과 여름에는 농장 일이 너무 힘들었다. 여름에 비닐하우스 안의 온도는 40도가 넘었다. 한 달에 토요일 두 번만 쉬었다. 아침에 해가 뜰 때 일을 시작하고, 저녁에 해가 질 때 일을 마쳤다. 일이 바쁠 때는 한 달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사장이 계속 일을 시켰고, 거부하면 "개새끼" 같은 욕이 돌아왔다.
한번은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하다 왼쪽 손가락이 파이프에 끼이는 사고 발생했다. 사장은 병원에 가면 돈이 많이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서 약국으로 가서 약과 붕대를 사다가 나한테 줬다.
농장 한쪽에 있는 기숙사는 창고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움막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주방에 물이 떨어졌고, 방의 벽에도 물이 스몄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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