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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지켜주시길" 뉴욕 동성부부에 '교황이 허락한'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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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결정 다음날 축복…"역사 만들었다"

가톨릭 내 환영·반발 엇갈려…보수파는 "죄가 되는 관계 축복 안 돼"

연합뉴스

동성 커플을 축복하는 가톨릭 사제
지난 9월 20일(현지시간) 독일 쾰른 대성당 앞에서 한 신부가 여성 커플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진형 기자 = 가톨릭 사제가 동성 커플에 대해 축복을 내려도 된다는 교황청의 결정 이후 미국 등 가톨릭교회가 요동치고 있다.

이런 결정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동성 신자들이 잽싸게 신부로부터 축복을 받은 사례가 나오는가 하면, 가톨릭계 안팎에서 환영과 동시에 반발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19일(이하 현지시간)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교황청이 동성 커플 축복 허용을 발표한 지 하루 뒤인 이날 둘 다 남성인 제이슨 스티들 잭(38)·데이미언 스티들 잭(44) 부부가 뉴욕 맨해튼에서 예수회 소속 제임스 마틴 신부의 축복을 받았다.

앞서 전날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교리 선언문에서 동성 커플이 원한다면 가톨릭 사제가 이들에 대해 축복을 집전해도 된다고 밝혔다. 이 선언문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비록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은 교회의 정규 의식이나 미사 중에 집전해서는 안 되고 혼인성사와는 다르다는 단서를 달았으나, 동성 커플을 배제하는 가톨릭교회의 전통과는 다른 역사적 결정을 내린 셈이다.

이 같은 발표 직후인 전날 오후 마틴 신부가 오랜 친구인 제이슨에게 문자메시지로 축복을 받고 싶냐고 묻자 제이슨은 반색하며 얼른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제이슨과 데이미언은 이날 오전 셔츠 등 편안한 차림으로 맨해튼의 마틴 신부 숙소를 찾았다.

동성 커플 축복이 혼인성사의 정식 축복과 혼동되지 않도록 "결혼식에 적합한 의상이나 몸짓, 언어"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교황청의 경고에 따라 마틴 신부도 사제복(수단)이 아닌 일반 정장 차림으로 숙소 거실에서 이들을 맞았다.

미국 주교회의가 펴낸 축복 기도문 전집에는 동성 커플을 위한 축복 기도문이 없어 마틴 신부는 자신이 좋아하는 구약성서 구절로 축복 기도를 했다.

그가 "주님의 은총과 가호가 있기를"이라고 말하며 부부의 어깨에 손을 얹자 부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서로 손깍지를 꼈다.

이어 마틴 신부가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이라고 한 뒤 손으로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밝히자 세 사람은 벅찬 표정으로 서로 껴안았다.

축복을 마치고 숙소를 나선 제이슨·데이미언 부부는 축복이 일상적이면서도 심오한 느낌을 줬다고 말했다.

마틴 신부는 미국 가톨릭계에서 성소수자를 돌보는 것으로 유명한 인사로서 이날은 집에서 역사를 만든 셈이다.

그는 이런 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면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남녀 간의 결혼만 인정하는 가톨릭 교리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교황청의 이번 결정은 가톨릭 내에서 동성애자 신자들을 옹호해온 이들에게 2천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기관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승리라고 NYT는 평가했다.

이미 많은 동성애자 신자가 성당이 바쁜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면 축복을 받을 준비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상대적으로 보수적 세력이 강한 미국 가톨릭계의 반응은 환영과 반대로 양분되고 있다.

소수의 진보적 가톨릭 성당들이 성소수자 신자 포용에 앞장선 뉴욕에서는 이번 소식으로 일부 사제들이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며 흥분했다.

반면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보수적 가톨릭계는 일부는 분노, 다른 일부는 체념하는 분위기다.

보수파 사제인 뉴욕 성가족성당의 제럴드 머리 신부는 "나는 본질적으로 심각한 죄가 되는 성적 관계로 결부된 두 남성이나 두 여성에 절대로 축복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교황이 동성애 행위와 간통의 부도덕성과 관련된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는 사제들을 끔찍한 입장으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보수적 가톨릭 매체인 '라이프사이트뉴스'도 이번 결정이 "교회가 죄가 되는 관계를 축복할 수 없다는 변할 수 없는 가톨릭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국 내 젊은 신부들이 고령의 주교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보수적이어서 교구별로 갈등의 소지가 있다고 NYT는 전했다.

마시모 파졸리 미 빌라노바대 신학 교수는 "고령의 주교들은 이번 결정에 개방적이지만, 많은 젊은 사제들은 설득을 거칠 필요가 있을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미국 주교회의는 짧고 조심스러운 성명을 통해 일반적인 축복과 혼인성사 간의 차이를 강조했다.

치에코 노구치 미 주교회의 대변인은 "가톨릭교회의 결혼에 대한 가르침은 바뀌지 않았으며 이번 선언은 이를 확인했다"면서도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님의 치유하는 사랑과 자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는 사제 개인의 축복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2019년 퓨리서치센터 여론조사에서 미 가톨릭 신자의 60% 이상이 동성 결혼을 지지한 점을 고려하면 이번 결정에 미 가톨릭 신자 대다수가 반발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고 NYT는 덧붙였다.

j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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