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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전두광 처럼 보일까 걱정”…‘서울의 봄’을 본 군인들 생각은? [Th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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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이브: The 5] 작전명 ‘생일집 잔치’와 그 후

한겨레

영화 ‘서울의 봄’ 예고편 속 전두광(황정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유튜브 채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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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간이 없지 관심이 없냐!’ 현생에 치여 바쁜, 뉴스 볼 시간도 없는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뉴스가 알려주지 않은 뉴스, 보면 볼수록 궁금한 뉴스를 5개 질문에 담았습니다. The 5가 묻고 기자가 답합니다. ▶▶주간 뉴스레터 휘클리 구독신청 검색창에 ‘휘클리’를 쳐보세요.

1979년 신군부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관객 6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12·12의 반란 세력과 진압 세력의 삶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데요. 2년 전 숨진 뒤 서울 연희동 집에 있는 전두환씨의 유해는 장지 예정지였던 경기 파주시 주민들의 반대로 안장이 무산됐습니다. 신원식 현 국방부 장관이 “(12·12 군사반란은) 나라를 구하려 한 일”이라고 했던 과거 발언도 다시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군은 영화 ‘서울의 봄’ 흥행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국방부를 출입하는 통일외교팀 권혁철 기자에게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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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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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 군이나 국방부 사람들도 영화를 많이 봤을까요?

권혁철 기자: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본 사람들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군이 전두광(전두환) 보안사령관처럼 ‘탐욕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비칠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걱정에) 신원식 장관이 했던 말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고요.

하지만 신 장관 때의 군과 지금 군과는 구성이 좀 다릅니다. 그러니 생각도 달라졌다고 봐야겠죠. 지금 육군참모총장은 1986년 육사에 들어가 1990년부터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장교 생활을 시작한 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인 것이죠. 옛 선배들이 가지고 있던 선민의식(소수의 사람이 가지는 우월감) 같은 건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군사반란을 주도한 전씨와 하나회(육군 사관학교 11기 중심으로 만들어진 비밀 사조직) 군인들은 1950년대 육사에 입학해 1960~70년대 군대 생활을 하다 쿠데타를 일으켰으니까요. 그 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하나회는 완전히 군에서 사라지게 됐고요.

[The 2] 김영삼 대통령이 했던 하나회 숙청 작업을 말하는 건가요?

권혁철 기자: 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11일 만에 벌어진 일인데요.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하나회 핵심들을 전격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어요. 취임 석 달 만에 장군 18명이 옷을 벗었는데요. 떨어진 별만 40개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했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 생명을 건 일이었어요. 당시 ‘하나회 쿠데타 모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었어요. 김영삼 정부도 그 가능성에 무게를 뒀던 것 같고요. 쿠데타 주도 가능성이 있는 장성들을 밀착 감시할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실행은 안 됐습니다. 구심점이 될 만한 장성급들이 갑자기 다 옷을 벗었으니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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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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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3] 그때 신군부 독재가 끝난 ‘서울의 봄’이 온 건가요?

권혁철 기자: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된 1995년에 와서야 그렇다고 봐야겠죠.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학살, 비자금 조성 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군 지휘부인 장성급만 아니라 대대장급 현장 지휘관까지 처벌을 받았어요. 설령 성공한 쿠데타라도 주모자뿐만 아니라 명령을 받고 실행한 사람까지도 언젠가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군이 알게 된 것이죠. 그 뒤 현장지휘관들 생각도 많이 바뀌었고요.

하지만 명예회복은 다른 문제입니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김오랑 중령만 해도, 명예를 회복한 건 최근이거든요. 그는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 총격으로 숨졌는데요. 업무 중 사망한 ‘순직’으로 처리됐다가 지난해에야 교전 중 사망한 ‘전사’가 인정됐어요. 아예 지금까지도 주목받지 못하는 죽음도 있고요.

[The 4] 주목받지 못한 죽음이라고요?

권혁철 기자: 김 중령 말고도 12·12 당시 2명의 병사가 교전 중 사망했습니다. 국방부 헌병대 소속 정선엽 병장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소속 박윤관 일병입니다. 말 그대로 병역의 의무를 다하던 젊은이들이 그냥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죽은 거예요. 이분들은 아직 이름조차 호명되지 못했는데, 관심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The 5] 시민들은 이제 안전한 걸까요?

권혁철 기자: 지금은 현장 지휘관의 생각이 다를 뿐만 아니라 군대 내 사조직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전씨가 쿠데타의 기반으로 삼았던 군 정보기관 보안사령부(현 방첩사령부)는 그 뒤로도 계속 말썽이에요. 멀리는 1990년 정계·노동계·종교계를 사찰했던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고요. 2012년 대선 땐 댓글로 여론조작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에는 비밀리에 불법 계엄령 문건을 작성하고 실행을 준비하기도 했고요. 지속적인 견제와 감시가 필요해 보입니다.

▶▶[The 5]에 다 담지 못한 작전명 ‘생일집 잔치’의 반란 과정, 진압 세력의 비극적인 삶을 휘클리에서 모두 읽어보세요. ▶▶주간 뉴스레터 휘클리 구독신청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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