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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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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자판기에서 마약용 주사기·마약 해독제 나눠주는 미국의 ‘깊은 뜻’은? [워싱턴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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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약 과다복용 사망 줄이기 프로젝트
응급 해독제 무료 배포에 워싱턴시도 가세
“구명이 근절보다 시급” 인식 따른 ‘고육책’
공급 차단 나선 바이든… “피해부터 줄여야”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속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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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미국 오리건주 도시 포틀랜드 시내에서 한 경찰관(왼쪽)이 불법 마약을 투여한 뒤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 옆에 서 있다. 작년 한 해 미국에서 약 11만 명이 마약 과다 복용으로 숨졌는데, 합성 아편류 마약인 펜타닐 과용에 의한 사망자가 7만 명 이상이었다. 포틀랜드=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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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도 워싱턴시에는 7대의 특이한 자동판매기가 있다. 돈을 받지 않으니 엄밀하게는 판매기가 아니다. 펜타닐 등 아편류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에 따른 급성 중독 증상을 치료하는 응급 해독제 ‘나르칸’(성분명 ‘날록손’), 그리고 약이나 음식에 펜타닐 성분이 함유돼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펜타닐 식별기’(테스트 스트립)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자판기 한 대가 설치된 워싱턴 남서부 하프가 7번 소방서 앞을 찾아가 봤다. 자판기는 올해 4월 낡은 펩시 콜라 자판기 옆에 설치됐다. 나르칸과 펜타닐 식별기가 칫솔·치약 같은 위생용품, 반창고, 피임기구 등과 함께 자판기 안에 진열돼 있었다. “지금 누군가 과다 복용하고 있다면 복용을 멈추고 911로 전화하세요”라는 문구가 자판기 정면에 보였다.

소방서 앞 마약 해독제 자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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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비영리 단체 FMCS가 운영하는 아편류 마약 해독제 ‘나르칸’ 자동판매기 4대 중 3대는 소방서 앞에 있다. 사진은 지난달 18일 미국 워싱턴 남서부 하프가의 7번 소방서 전경. 사진 오른쪽에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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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사용법은 간단하다. 자판기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하면 코드가 전송되는데, 돈을 넣는 대신 코드를 기계에 입력하면 필요한 내용물이 나온다. 24시간 아무 때나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나르칸은 쓰기 어렵지 않다. 코에 뿌리기만 해도 마약 과용 탓에 멈춘 호흡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펜타닐 식별기는 속아서 펜타닐에 중독되는 것을 막기 위한 기구다.

맑은 날씨에도 분위기가 스산했다. 소방관에게 “왜 하필 소방서 앞에 마약 해독제 자판기를 놔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모르겠다”며 “소방서와 자판기가 공유하는 것은 전원 케이블뿐”이라고 대답했다. 다만 “이 지역은 가난하고 치안이 나쁘다”며 “자판기가 놓인 다른 소방서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범죄 정보가 포함된 지역 부동산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 인터넷 사이트 ‘네이버후드스카우트’에 따르면, 하프가 주변은 워싱턴은 물론이고 미국 전역을 통틀어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에 속한다. 흑인 주민이 유독 많은 곳이기도 하다. 자판기 설치 장소는 마약 과다 복용률이 높은 곳을 골랐다는 게 시 당국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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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도 워싱턴 남서부 하프가의 7번 소방서 앞에 아편류 마약 해독제 ‘나르칸’ 자동판매기가 콜라 자판기와 나란히 서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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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남서부 소방서 자동판매기에 들어 있는 아편류 마약 해독제 ‘나르칸’.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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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자판기도 찾아가 봤다. 워싱턴 북서부 쇼 지역 7번가 비영리 구호단체 ‘브레드포더시티(BFC·도시를 위한 빵)’ 외부에 놓인 기계였다. 소방서 앞 자판기보다 사용법 설명이 구체적이었고, 특히 해독제와 펜타닐 식별기 구하기가 더 쉬웠다. 두 품목은 코드(9999)가 자판기에 적혀 있어서, 코드를 받으려 전화를 걸 필요도 없다.

소방서 자판기에는 없는 물품도 있었다. 주사기, 지혈대와 약을 담는 소형 금속 용기까지 갖춰진 약물 투여 키트다. 왜 주사기까지 주는 걸까. “새 주사기를 주면 마약 사용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BFC 홍보 책임자 애슐리 돔은 반박했다. “마약 투약을 위해 주사기를 공유하거나 재사용하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옮거나 다른 감염병에 노출되기 쉽다. 새 주사기 사용은 약물 투여자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게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소(NIDA) 연구 결과다.”

마약으로 인한 사망자 85%가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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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도 워싱턴 북서부 쇼 구역 7번가 비영리 구호단체 ‘브레드포더시티’ 외부에 설치돼 있는 아편류 마약 해독제 ‘나르칸’ 자동판매기. 옆면에 나르칸을 사용하는 방법이 안내돼 있다. 이 자판기를 운영하는 HIPS는 성 노동자에게 건강 관리 방법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30년 전 설립된 비영리 단체다. 지난달 21일 촬영한 사진.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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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운영에는 워싱턴 보건당국이 보조금을 지원한다. 올해 4월에 30만 달러(약 4억 원) 규모의 시범 사업을 시작했다. 비영리 단체 두 곳에 15만 달러씩 배분하고 자판기 관리를 위탁했다. 소방서 자판기는 FMCS(Family and Medical Counseling Service·가족 및 의료 상담 서비스)가 맡고 있다. 소방서 3대와 지역 보건 센터 1대 등 모두 4대다.

자판기 사업의 최대 장점은 접근성 강화다. 주변 시선이나 낙인이 두려워 마약 피해 구제 수단을 포기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 안젤라 우드 FMCS 최고 운영 책임자는 10월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에 “어려운 과정을 거치거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도 아무도 모르게 (마약 응급 해독제 등) 필요한 것을 얻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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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북서부 구호단체 ‘브레드포더시티’ 외부에 놓여 있는 아편류 마약 해독제 ‘나르칸’ 자동판매기. 소방서 자판기에는 없는 주사기가 들어 있다. 옆에 있는 빨간 통은 이미 쓴 주사기를 버릴 수 있는 폐기물 용기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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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북서부 구호단체 외부 자판기가 구비하고 있는 주사기.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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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은 후발 주자다. 마약 해독제 자판기가 미국 대도시에 등장한 건 2017년 네바다주(州) 라스베이거스가 처음이다. 2021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가 뒤를 따랐다. 신시내티대학의 대니얼 아렌트 교수는 도입 첫해에만 나르칸 3,360회분과 펜타닐 식별기 1만155회분이 자판기에서 나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신시내티가 속한 해밀턴 카운티의 중독대응연합(HCARC)은 연례 보고서에서 2021년 515명이던 약물 과다 복용 사망자 수가 지난해 433명으로 16% 감소했다고 밝혔다. 미국 탐사 매체 인베스티게이트TV에 따르면, 현재 나르칸 자판기가 도입된 지역은 신시내티 외에도 위스콘신주 록 카운티, 미주리주 포플러 블러프, 뉴욕주 옷세고 카운티, 미시간주 새기노, 일리노이주 록퍼드 등이다.

자판기는 고육책이다. 최선책은 마약 근절이다. 그러나 단숨에 가기 어렵다. 워싱턴 보건당국이 집계한 지난해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 사망자는 448명이다. 2018년(213명)의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시범 사업 시작 당시 바버라 바즈론 시 당국 행동건강국장은 “마약으로 인한 사망자가 너무 많다”며 “마약 피해를 줄이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FMCS 우드 책임자는 인베스티게이트TV에 “마약을 끊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생명을 살리고 보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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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이후 미국 마약 과다 복용 사망자 현황. 그래픽=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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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적극적 시도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FMCS와 더불어 자판기 시범 사업 주체로 선정된 HIPS(Honoring Individual Power and Strength·개인에게는 역경을 견디고 이겨 내는 힘이 있다)가 보기에 시 당국 대응은 여전히 미온적이다. HIPS는 BFC 등과 협조해 시 북서부 등에서 자판기 3대를 운영 중이지만, 겨우 시작일 뿐이다.

보건 전문가를 상주시켜 안전한 마약 투약을 보장하는 ‘과다복용예방센터’(OPS·Overdose Prevention Center)가 설립돼야 한다는 게 HIPS·BFC 등의 요구다. 이들은 시 당국의 예산 편성 거부가 상당 부분 인종주의 탓이라고 의심한다. 2017년 이후 6년간 워싱턴의 마약 과다 복용 사망자의 85%가 흑인이었다. 백인이 많았으면 달랐으리라는 것이다. BFC의 돔 책임자는 “단속으로 마약 투여자를 음지에 몰아넣는 대신 양지로 유도해 덜 위험한 마약 투약 공간을 제공하고 관리하는 편이 과다 복용 사망을 줄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장기 중독자 없는 펜타닐... “치사율 높아서”


펜타닐은 장기 중독자가 없다고 한다. 워낙 치명적이어서 장기 중독자가 되기 전에 사망하기 때문이다. 펜타닐 치사량은 2㎎이다. “연필로 찍었을 때 끝에 묻는 정도”라고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설명한다. 그러나 시장이 너무 탄탄하다. 실험실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데다 효과가 워낙 강력해 유통하기도, 마진을 남기기도 좋다. 수요도 충분하다. 1990년대 한 제약사의 탐욕이 마약성 진통제 시장을 확 키워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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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 우드사이드의 별장 ‘파일롤리 에스테이트’에서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미중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단속 공조 합의를 최우선 성과로 꼽았다. 우드사이드=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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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 국가마약통제정책국(ONDCP) 라훌 굽타 국장은 지난달 21일 미국 유에스에이투데이 기고에서 “미국은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복잡한 불법 마약 환경에 직면했으며, 5분마다 미국인이 마약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다”고 했다. 주범은 펜타닐이다. 지난해에만 미국에서 11만 명이 마약 과용으로 숨졌는데 그중 7만5,000명에게 치사량이 넘는 합성 오피오이드가 투여됐고, 이 마약의 90% 이상이 바로 펜타닐이었다.

펜타닐 문제의 해결은 내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상 과제다. 초점은 공급망 단절에 맞춰져 있다. 중국에서 생산된 원료가 멕시코에서 제품으로 만들어져 국경을 넘는 게 통상적인 펜타닐의 미국 반입 경로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중국·멕시코 정상과 따로 만난 목적 중 큰 부분이 펜타닐 생산·밀매 차단 공조 방안 의논이었다.

그러나 수요가 온존하는 한 공급 통제에는 한계가 있다. 과다 복용 사망을 줄이려면 당장 용량에 대한 무지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게 ‘펜타닐’(2019)을 쓴 탐사 전문 기자 벤 웨스트호프의 조언이다. 안전한 사용 환경 요구와 맥이 닿는다. 마약 밀매는 처벌하되 사용에 대해서는 치료에 집중해야 일단 피해를 최소화하고 장기적으로 수요도 억제할 수 있다고 그는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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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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