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도, 직업도, 능력도 지극히 평범한 그의 비밀은 하루에 단 세 시간만 잔다는 것이다.
수면시간은 매일 똑같이 고정돼 있다. 새벽 4시 반 전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자리에 들 수 없고, 아침 7시 반이 되기 전이라면 침대에서 떨어뜨려도 일어나지 못한다.
남들보다 훨씬 짧게 자지만, 평소 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밤에는 취미활동을 실컷 하거나 돌쟁이 딸과 놀아주고, 낮에는 단 한 번의 지각 없이 회사에 출근하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아왔다.
특이하긴 하지만 별문제 없던 인생에 이상이 생긴 것은 서른 중반의 어느 날이었다.
그간의 규칙을 깨고 자신도 모르게 6시간이나 잠이 든 것이다. 그다음에는 12시간, 24시간, 이틀 이런 식으로 수면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웹툰 '백억년을 자는 남자' |
'백억년을 자는 남자'는 이처럼 특이한 수면 패턴을 가진 주인공 양승조를 중심으로 그려낸 심오한 SF 웹툰이다.
주인공은 수면시간이 자꾸만 늘어나자 병원부터 사설 연구소까지 찾아다니며 온갖 검사를 받지만, 치료법을 찾지 못한다. 다만 잠드는 동안은 노화하지도 않고, 음식 섭취나 배설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만 알게 된다.
승조가 잠에 한 번 들었다 깰 때마다 시간은 수개월, 수년씩 훌쩍 지나간다.
10개월이었던 딸은 어느새 장난기 많은 유아에서 서먹서먹한 사춘기 여학생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결혼을 앞둔 20대가 된다.
승조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깨어날 때를 기다려 결혼식을 올리기도 하고, 여행을 가는 등 짧은 시간이나마 추억을 최대한 많이 쌓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잠드는 시간이 22년, 45년 정도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어느덧 승조의 부모님과 아내, 친구, 자식까지도 세상을 떠난다.
잠에서 깬 뒤 자신과 추억을 나눴던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승조는 절망한다.
세상도 빠르게 변화한다.
1990년대 배경의 한국은 승조가 잠에서 깰 때마다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21세기 초중반부터 기후변화로 인해 대재앙을 맞는다.
전기와 물자가 귀해지면서 생활 수준은 퇴보하고,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여기에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내몰고 지구를 착실하게 파괴한다.
수백 년, 수천 년에 한 번씩 승조가 깨어날 때마다 마주하는 풍경은 매번 다르다. 아예 초토화된 지구에 생명체라곤 없을 때도 있고, 인류가 농경사회로 되돌아가기도, 어떨 때는 우주선을 띄워 우주를 유랑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승조는 시공간을 오가는 안드로이드 용팔, 사유하는 로봇 1 등 새로운 친구들을 얻는다.
[레진코믹스 SNS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 |
이 웹툰은 미스터리한 설정을 배경으로 깔고 사이사이 가족 간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 우리도 잘 아는 여러 기술의 발전상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승조가 혈육과 모두 헤어지고 낯선 미래에 홀로 남았을 때부터 드러난다.
작품 곳곳에 양자물리학과 타임 패러독스(역설) 등 SF 요소를 착실하게 섞었지만, 그 아래에는 철학과 종교적인 물음을 깔았다.
극도의 효율을 위해 뇌만 남기고 신체는 없애버린 신인류, 잘린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 휴머노이드, 동물의 몸에 인간의 유전자를 이식해 만든 뮤턴트 등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정의와 본질, 삶의 목적 등을 끊임없이 논하는 식이다.
1화 '3시간 후'부터 222화 '6천710만8천864일 후'까지 길게 이어지는 승조의 여정을 함께하다 보면 독자들도 작중 안드로이드 용팔이 찾던 '궁극의 해답'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레진코믹스에서 볼 수 있다.
he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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