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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월)

귤도 선을 넘으면 탱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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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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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는 나라를 지킨 탱자나무 두 그루가 있더라

탱자나무는 철조망을 대신하여 심었다. 방어를 위한 목적인 까닭에 겹겹이 그리고 줄줄이 심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마지막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면 차라리 정원수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강화도에서 그렇게 정원수가 되어버린 탱자나무를 만났다. 노랗게 익은 탱자가 푸른 가을 하늘을 이고서 뒤편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흔들리고 있다. 가을 분위기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가시는 감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정원수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79호’라는 세로형 돌 명패는 1962년 무렵 제작되었다. 기계로 새긴 글씨가 아니라 손글씨체인 까닭에 더 살갑다.

사백년 수령의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한 그루에는 강화도의 전쟁역사가 담겨있다. 그 탱자나무는 본래 따뜻한 남쪽이 고향이었다. 주로 과수원의 담장나무로 외부인의 무단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가시’ 때문에 북쪽으로 이주를 당한 ‘전략(戰略)’식물이 되었다. 고려 조선 두 왕조의 수도였던 개성과 한양에서 가깝고 예성강 임진강 한강을 통하여 이동하기 쉬웠던 강화도는 주로 북방 이민족이 쳐들어 왔을 때 임시수도로 사용했던 곳이다. 유목민족은 해전(海戰)에 약한 약점을 최대로 이용할 수 있는 나름의 지정학적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섬의 주요 군사요충지와 성벽 부근에는 탱자나무를 심었다. 오래전부터 조정은 남쪽 지방에서 징발한 종자를 강화도로 보냈고 이식 이후의 생육상태를 보고받았다고 한다. 유사시를 위한 대비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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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사기리 탱자나무. 강화군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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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섬 구석구석에 수없이 많이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위’라는 기후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까닭에 현재 남아있는 것은 갑곶돈대 옆에 있는 천연기념물 78호 탱자나무를 포함한 단 두 그루 뿐이다. 탱자 가시가 나라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전쟁사를 증명하는 소박한 유물이 된 셈이다. 이주식물이란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방한계선이란 생태적 가치까지 더해져 ‘천연기념물’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성 둘레에 해자(垓字 물길과 못)를 파고 성 아래에는 탱자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보인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은 탱자나무 숲(枳林)으로 둘러 쌓인 까닭에 지성(枳城)이라 했다. 우리말로 하면 ‘탱자성’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체계의 발달과 더불어 용도가 없어진 담장나무는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상징적으로 다시 심은 ‘정원수’ 탱자나무 몇 그루로 옛 명성을 실낱같이 이어가고 있다.

탱자나무 때문에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안에서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그 시절 유배지로 보내는 형벌에는 ‘위리안치(圍籬安置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에 편안하게 모신다)’가 더해졌다. 울타리(籬)는 물론 탱자나무 울타리다. 거주지에 탱자나무로 담장을 둘러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 표현한다면 가택연금인 셈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서민들은 달랐다. 탱자나무 가시가 달려있는 가지를 꺾어 일부러 대문 앞에 걸어두었다. 민간에서는 바깥의 나쁜 기운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술용으로 진화한 것이다.

탱자와 자주 대비되는 식물인 귤도 ‘강제이주’의 역사가 있다. 제주도의 귀한 귤은 육지로 운반하는 것 자체가 예삿일이 아니었다. 작은 배편 외는 별다른 이동수단이 없던 시절에 섬의 특산물을 왕실의 진상품으로 원하는 날짜에 납품한다는 것은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연재해의 위험도를 낮추고 신선도 유지를 위해 유통 거리를 줄이려는 궁여지책이 나왔다. 뭍에서 가장 따뜻한 남쪽 해안가 지방에 제주섬의 귤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다. 예상대로 일정 부분 성공한 모양이다. 그래서 전남 강진에 유배됐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되듯이 지금 탐진(강진)에는 귤과 유자가 생산되는데 월출산 북쪽만 가면 곧 변하여 탱자가 된다. ...중국의 회남(淮南)과 더불어 그 남북의 위도가 같다.”라는 기록을 통해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귤이 월출산 북쪽만 넘어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은 ‘귤화위지(橘化爲枳)’ ‘남귤북지(南橘北枳)’의 조선판 버전인 셈이다. 원문인 중국문헌에는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고 했다. 회수는 양자강과 황하 사이에 있으며 중원의 강남과 강북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강이다. 남북의 기후는 말할 것도 없고 풍속 또한 다르기 때문에 사람의 기질 역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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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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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때 초(楚)나라 영왕(靈王)에게 제(齊)나라 안자(晏子)는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귤과 탱자로 설명했다.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온 죄인을 앞에 두고서 영왕은 ‘제나라 사람은 모두 도둑질을 잘하느냐?’고 안자에게 비아냥거린 것이 발단이었다. 이 말을 그대로 듣고 있을 기질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회심의 대답 ‘한 수’를 내놓았다.

“제나라 살 때는 도둑질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을 보니 초나라의 풍토가 나쁜 모양입니다. 강남에 있던 귤이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됩니다.”

안자의 일격으로 승자는 패자가 되고 패자는 승자가 되었다.

뒷날 송나라 야보도천(冶父道川)선사는 ‘강북에서 탱자되고 강남에선 귤이 되지만(江北成枳江南橘) 봄이 오면 모두 함께 같은 꽃을 피운다(春來都放一般化)’고 했다. 귤과 탱자를 나누면서 굳이 다른 부분만 자꾸 보려고 하지 말고 공통점도 함께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함을 모두에게 주문했던 것이다.

글 원철 스님(불교사회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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