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는 0건... 현장 상황까지 꼼꼼히 따져
"형량 너무 낮아" vs "산재 예방에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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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개월 동안 선고된 사건 중 유죄 비율 100%. 그러나 유죄 사건 중 집행유예가 90.9%. 실형은 단 한 건.
중대한 산업재해나 시민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효력을 발휘한 지난해 1월부터 지금까지 법원(하급심)이 선고한 관련 사건의 결과다. 선고가 나온 11건 모두에서 유죄 판단이 나온 것을 볼 때 법원이 경영진과 원청업체의 안전관리 책임을 엄중하게 묻는 것으로 보이지만, 집행유예 위주 판결론 '일벌백계'를 삼기 어렵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28일 한국일보가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선고가 나온 하급심 사건 11건을 전수분석한 결과, 이 혐의로 기소된 원청의 경영책임자가 무죄를 선고받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피고인 대부분 혐의를 인정한 이유도 있지만, 법원이 원청의 관리 책임을 꼼꼼히 따졌기 때문이라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재판에서 기업 측은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했다"며 책임을 낮춰보려 했지만, 실제 법원은 사고 현장에서 적합한 수준의 관리 감독이 이뤄졌는지를 세밀하게 살폈다. 지난해 3월 크레인에서 떨어진 190㎏짜리 철근에 맞아 하청 노동자가 사망한 건륭건설 사건이 대표적이다. 사측은 재판에서 "안전보건경영시스템 관련 컨설팅을 받았고, 위험성 평가표 등 매뉴얼을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일반적 공사현장에서 지켜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사망사고가 벌어진 현장의 특성에 따른 유해·위험 요인을 개선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맞춤형 안전책 없이 일반적으로 어느 현장에서나 쓸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한 것 정도론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시각물_중대재해처벌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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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건설 사건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5월 굴착기와 담장 사이에 하청 노동자가 끼어 숨진 사고였다. 이 사건에서 사측은 "안전시설물 구비에 필요한 예산을 집행했고 굴착기 등을 유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법원은 "안전시설물 구비와 별도로 재해 예방에 필요한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며 "굴착기 유도자는 유도 업무만을 고정적으로 담당한 사람도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원청 경영책임자들이 공사 현장 특성에 맞춰 안전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면, 사망사고와 안전체계 미비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얘기다.
유죄 11건 중 10건은 징역형 집행유예였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자백, 유족과의 합의 및 처벌 불원 의사, 재범 방지 계획 등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로 삼았다. 사망한 노동자의 과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고 책임을 전적으로 경영책임자에게만 묻지는 않았다.
실형은 한국제강 사건 1건에 불과했다. 성형식 한국제강 대표는 하청 노동자가 1,200㎏ 방열판에 깔려 숨진 사건으로 기소돼 1·2심에서 연이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2021년 5월 한국제강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로 인해 성 대표가 유죄를 확정받았음에도 안전한 작업장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다. 경영진에 대한 형사 처벌과 별도로 원청 회사 법인에 부과된 벌금은 최소 2,000만 원, 최대 1억 원으로 평균 5,272만 원이었다.
노동계에서는 '100% 유죄'를 환영하면서도 형량이 약해 산재 예방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현행법상 형량 범위는 징역 1~30년이고 벌금은 1억~50억 원인데, 형량이 하한선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권영국 변호사는 "검찰이 낮은 형량을 구형하고, 법원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고 지적했다. 노동법 전문 손익찬 변호사 역시 "벌금을 매출액과 연동시켜 부과하는 식으로 법이 바뀌어야 경각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형 선고만이 능사가 아니란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집행유예는 피해자나 유족과의 원만한 합의의 결과물이지, 법원이 무작정 봐준 결과는 아니란 얘기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원청 경영책임자를 강하게 처벌할 길을 열어준 것으로도 의의가 있다"며 "집행유예만 선고돼도 사업상 어려움이 발생하고,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실형을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평가했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대부분 하청을 통해 이뤄지는) 공사현장에서 사고를 직접 예방할 수 없는 원청 경영책임자의 잘못을 강하게 묻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준규 기자 ssangkk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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