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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A/S도 부탁해”…전국 검찰청에서 쪽지
손성민 대전지검 검사가 3일 오후 법교육 테마공원인 대전 솔로몬로파크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손 검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문과 출신으로 2018년 처음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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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공계 출신일 거라 생각하고 던진 “혹시 전공이…”라는 질문에 손 검사는 “저도 법학 전공인데요”라고 답했다. 일 많기로 유명한 형사부 검사인 그가 임관 후 5년간 독학으로 만든 업무처리 프로그램은 교통범죄·성폭력 관련 등 8개가 된다. 혹시 ‘자기만 편하자고 만든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손 검사가 만든 프로그램은 전국 검찰청의 검사나 수사관들에게 아낌없이 공유되고 있었다.
“올려주신 프로그램 자료들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2021년 논산지청 A검사)라는 쪽지부터 “정말 바쁘실 텐데 프로그램 관련해서 잠시 문의드리려고 합니다”(2022년 고양지청 B검사), “제가 잘 몰라서 여쭤봅니다”(2021년 고양지청 C검사)는 ‘A/S 요청’까지 전국 검찰 구성원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손 검사는 “가끔 법이 바뀌거나 하면 업데이트를 해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손 검사가 수사 업무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처음 접목한 건 초임 시절인 2019년에 교통 전담 부서인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에서 근무하면서라고 한다. 손 검사는 “음주운전 사건이 워낙 많았는데 건건이 사건처리기준을 확인하고 이를 적용, 결과를 출력해 첨부하는 단순 작업을 해야 했다”며 “이걸 자동화하면 몇십분 걸리는 일을 10초 만에 할 수 있겠다 싶어 클릭 한 번에 확인·적용·출력까지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손 검사는 “처음 만들 때 시간이 걸리지만 사건마다 투입 시간을 계속 줄이다 보면 ‘시간절약 분기점’을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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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쓰니 새로운 증거가…동물N번방 수사 기여
손성민 대전지검 검사가 3일 오후 국내 최초 법교육 테마공원인 대전 솔로몬로파크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해태상’ 앞에서 인터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손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에서 초임검사로 임관해 대전지검 서산지청, 대전지검 형사3부 등을 거쳤다. 프리랜서 김성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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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엔 성폭력 사건 처리 보조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지금도 일선 검찰청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서 실제 활용하고, 인수·인계 시 해당 프로그램을 활용할 것을 권하는 프로그램이다. 손 검사는 “성폭력 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미성년자일 경우 성년이 된 이후부터 공소시효가 시작되거나, 형법·성폭력방지법·청소년성보호법 등 적용 법 조항도 복잡해 수사 과정에서 오류 가능성이 높다”며 “공소시효 계산 및 수사보고까지 자동작성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단순 프로그래밍 작업은 사례 학습을 통해 새로운 데이터를 처리하는 AI 기술 활용으로도 발전했다. 손 검사는 가장 기억나는 사례로 대전지검 서산지청에 근무하던 2021년 일명 ‘동물 N 번 방’ 사건 수사를 떠올렸다. 화살을 쏘는 등의 수법으로 야생 동물을 잔혹하게 죽여 오픈 채팅방 등에 공유해 문제가 된 사건이다. 피의자 PC 등에서 파일 약 70만5000개가 쏟아져나왔다. 무려 3.6 테라바이트(TB) 분량이었다. 손 검사는 이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범죄와 관련된 파일만을 자동으로 분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는 “파일을 직접 골라내면 시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중요 증거를 누락할 가능성도 크다”며 “미리 동물 사진을 구별하도록 학습된(pre-trained Vision Model) PC를 구해와 자동 분류를 맡겨 놓고 퇴근했더니 2~3일 만에 작업이 완료됐다”고 말했다.
자동 분류된 증거 속에선 피의자가 평소 동물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성향이 있다는 증거가 새로 나와 손 검사는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2021년 11월 1심인 대전지법 서산지원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피의자는 AI로 찾아낸 새로운 증거를 통해 2심에선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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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휴식…새벽 4~5시에 출근”
손성민 대전지방검찰청 형사3부 검사가 3일 오후 대전광역시 서구의 대전지검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마친 뒤 검찰 내 사건처리기준과 양형 등을 고려한 AI를 개발하고 실무에 적용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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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그간 손 검사가 만든 프로그램은 ▶형사사건처리기준 적용 프로그램(2020년 4월) ▶음주운전 당시의 혈중알코올농도를 계산하는 위드마크 수사보고 작성 프로그램(2020년 8월) ▶마약 사건 적용법조 및 추징액 산정보고 자동작성 프로그램(2020년 10월) 등 다양하다. 심지어 전국으로 인사이동이 잦은 검사 업무를 고려해 2021년 1월엔 검찰 백업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메신저, 한글 상용구 등 일괄 백업 및 복원이 가능한 프로그램이다.
손 검사는 최근 음주운전 선고형량을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대검이 발간하는 웹진 ‘법과 과학’에 “AI 기술을 업무에 활용해보자”는 취지의 기고문을 냈다. AI로 판례를 학습시켜 평균적인 선고형량을 예측하면, 어떤 변수가 선고형량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는지 검토해 엄벌 필요성을 강조하거나 구형 기준이 상세하지 않은 사건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취지다. 법원 양형 기준의 감경·가중 요소를 수치화하면 다른 범죄에도 이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게 손 검사의 생각이다.
“형사부 검사들이 바쁘기로 유명한데 AI 개발까지 하면 언제 쉬냐”는 물음에 그는 “저는 주말에도 컴퓨터를 만지는 게 쉬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주중엔 일과를 일찍 시작하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늘린다. 대전지검 관계자는 손 검사에 대해 “보통 새벽 4~5시에 출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손 검사는 “아무 방해도 없는 시간을 가지면서 사건기록을 검토하거나 개인 공부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손 검사는 마지막으로 “요즘은 챗 GPT 같은 생성형 AI를 이용하면 원하는 코드를 작성해 준다”며 “단순 업무는 컴퓨터에 위임해 효율화하고, 남는 시간을 창의적 업무에 집중하여 검찰의 생산성을 계속해 높여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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