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미·유럽보다 둔화속도 느리지만
물가 정점·목표 이탈 감안땐 큰 차이 안나"
중동 사태 등 돌발 변수
물가전망치 상향 불가피
물가 목표 2% 도달 시점 지연
"한국의 경우 다른 어느 선진국에 비해서도 물가 안정은 가장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2023년 5월22일, 이창용 총재)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5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국이 다른 주요 선진국 대비 비교적 빠른 속도로 물가 안정에 다가가고 있다고 자평했지만, 실제 주요국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를 세세히 분석해보니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가 미국·유럽 등 주요국 대비 빠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이 30일 발간한 '주요국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둔화) 현황 및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과 유로지역의 정점 이후 소비자물가 둔화 속도를 월평균 하락폭, 반감기, 목표 수렴률 등 세 가지 지표로 분석해보니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가 미국과 유럽에 비해 빠르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7월 6.3%로 정점을 찍은 이후 올해 9월 3.7%를 기록했는데, 월평균 하락 폭은 0.19%포인트로 유럽(-0.57%p)과 미국(-0.36%p)보다 작게 나타났다. 같은 기간 물가 목표(2%)까지의 물가 상승 둔화 진도율(목표수렴률)도 한국이 60.5%로 미국(76.1%), 유로지역(73.3%)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미국과 유럽의 소비자물가 정점이 각각 9.1%, 10.6%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았고 지난 9월 기준 미국과 유럽의 소비자물가가 각각 3.7%, 4.3%를 기록한 점을 감안하면 주요 선진국의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가 우리보다 빨랐던 셈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 지역은 수요·임금 압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서비스물가 상승률이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한국은 근원상품물가의 오름세가 상대적으로 더디게 둔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원자재 대외의존도가 높은 데다 환율도 상승하면서 비용 상승 압력의 파급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창호 한은 조사국장은 "비록 월평균 물가 하락폭이 미국, 유럽 지역에 비해 작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물가 정점 수준이 낮았던데 기인한 것"이라며 "하락폭을 정점과 물가목표 이탈 수준을 함께 감안할 경우 우리나라 물가상승률 둔화 속도는 미국, 유로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 전쟁 등이 돌발 변수로 작용하면서 우리나라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가 당초 예상보다 더딜 것이란 점이다. 세계은행은 30일 발표한 '원자재 시장 전망'에서 이번 전쟁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개될 경우 제1차 석유파동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 세계 석유 공급량이 하루 600만∼800만 배럴 줄고, 유가는 배럴당 140~157달러까지 급등할 것으로 봤다. 최근과 같이 국제유가와 농산물 가격이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경우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둔화 재개 시점도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내달 한은이 다음달 수정 경제전망에서 올해와 내년 물가상승률을 얼마나 상향 조정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등 주요 예측기관들은 물가목표 2% 도달 시점을 미국은 2026년, 유로지역은 2025년 하반기, 우리나라의 경우 2025년 상반기 중으로 전망했다. 앞서 이 총재가 "내년 말 물가상승률이 2% 수준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언급했지만 물가목표에 도달하는 시기가 당초 예상보다 늦어질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시장도 물가 눈높이를 속속 높이고 있다.
씨티은행 김진욱 이코노미스트는 "예상보다 높은 식품 가격으로 10월 물가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3.8%로 높아질 것"이라며 "올해와 내년 물가상승률을 각각 3.7%, 2.5%로 종전보다 0.1%포인트씩 상향 조정했다"고 말했다. 박석길 JP모간 이코노미스트는 "채소 가격 급등으로 10월 물가상승률이 4.0%로 다시 4%대에 오를 것으로 전망한다"면서 "식료품 가격 급등과 유가 전망치를 반영해 한은이 내달 수정 경제전망에서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올려잡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JP모간의 올해와 내년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각각 3.7%, 2.5%다. 지난 8월에 한은이 전망한 올해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5%, 내년은 2.4%였다.
한은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중동 지역의 분쟁이 지금보다 확산되면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급등, 물가 상방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물가 전망치 상향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면서 "다만 11월 전망까지 아직 한 달간의 기간이 있는 만큼 중동 분쟁과 유가 흐름 등을 보면서 상향 폭을 결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