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44주기 추도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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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6일간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국빈 방문을 마치고 26일 오전 8시 40분께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으로 귀국한 윤 대통령은 옷만 검은색 양복으로 갈아입은 채 곧장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향했다. 오전 11시부터 열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44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추도식은 1980년에 시작됐는데, 현직 대통령이 참석한 건 윤 대통령이 처음이다. 공식 행사를 마친 뒤, 윤 대통령은 유족 대표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단둘이 길을 올라 묘역을 참배했다. 연출된 장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단 둘이 길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실현됐다. 관계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두 사람은 묘역을 오가며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장거리 다녀온 뒤 바로 추도식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순방 성과도 좋았다고 들었다.”
▶윤 대통령=“순방을 다녀보면 한국을 부러워한다. 그러면 제가 ‘딴 거 할 거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공부하면 된다’고 얘기한다.”
박정희 추도식에서 박정희의 업적을 놓고 보수 진영의 전ㆍ현직 대통령이 나란히 오가며 대화를 나눈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800여자 분량의 짧은 추도사에서도 박정희를 8번 언급했다. “오늘 우리는 이 나라의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님을 추모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며 추도사를 시작한 윤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하면 된다는 기치로 우리 국민을 하나로 모아 이 나라의 산업화를 강력히 추진하셨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사적 위업을 이루어내셨다”고 말했다. 취임 후 92개국 정상과 경제협력을 논의한 사실을 상기한 윤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뤄내신 압축 성장을 모두 부러워하고, 위대한 지도자의 결단에 경의를 표했다”며 “저는 이분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공부하라. 그러면 귀국의 압축성장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늘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복합 위기의 해법으로 윤 대통령은 ‘하면 된다’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하면 된다는 정신은 우리 국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우리 국민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셨다”며 “웅크리고 있는 우리 국민의 잠재력을 끄집어내서 우리 국민을 위대한 국민으로 단합시키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복합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박 대통령의 정신과 위업을 다시 새기고, 이를 발판으로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자랑스러운 지도자를 추모하는 이 뜻깊은 자리에서 영애이신 박근혜 전 대통령님과 유가족분들께 자녀로서 그동안 겪으신 슬픔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 드린다”며 추도사를 마쳤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전 당선인 신분으로 대구 달성군의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사진은 지난해 4월 박 전 대통령 자택에서 대화나누는 두 사람.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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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족 대표로 인사말을 했다. 윤 대통령과 비슷하게 800자 분량의 짧은 인사였는데, 그는 ‘우리’라는 말을 7번 썼다. “오늘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시자마자 곧바로 추도식에 참석해 주신 윤석열 대통령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며 인사말을 시작한 박 전 대통령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아버지께서 곁에 계신 것만 같다. 일생을 바쳐 이루고자 하셨던 잘사는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특히, “지금 우리 앞에는 여러 어려움이 놓여 있다고 한다”면서도 “저는 우리 정부와 국민께서 잘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밖에도 “우리 위대한 국민”, “우리와 우리의 미래 세대”, “아버지도 우리의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켜주실 것” 같은 말을 했다. 묘역 참배를 마친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추도식을 수행한 유영하 변호사와 함께 오랜만의 서울 일정을 마치고 대구 자택으로 돌아갔다.
박 전 대통령은 전날 밤까지도 직접 추도식 인사말 원고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 정부’ 등 우리를 유독 강조한 것은 보수 진영의 화합과 통합을 강조하는 의미 아니냐는 해석이 여권에서 나왔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이 '우리 정부'란 표현을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윤 대통령도 순방 출발 전, 일찌감치 이번 추도식에 참석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관련 내용을 잘 아는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이 한 번도 안 간 게 말이 되느냐’며 꽤 오래전부터 추도식 참석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안다”며 “박 전 대통령과의 만남도 이런 기조하에 준비됐던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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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만남은 이날이 세 번째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해 4월 대구 달성군의 박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아 “참 면목이 없다. 늘 죄송했다”고 말했다. 2016년 국정농단 특검 수사팀장으로 수사를 지휘했는데,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마음속으로 가진 미안함 들을 말씀드렸다”는 게 당시 윤 대통령의 설명이었다. 그 한 달 뒤 대통령 취임식에서 짧게 인사한 두 사람은 이번 추도식에서 1년 5개월 만에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보수 통합 행보라고 평가한다. 여권에선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대선 때 그랬던 것처럼 보수진영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인식이 팽배하다. 민생을 통한 중도 확장 못잖게 내부 단속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보수 본산으로 평가받는 대구ㆍ경북(TK)을 중심으로 한 영남권에서 윤 대통령 지지세가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도 포착된다. 20일 공개된 갤럽 여론조사(17~19일 성인 1000명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전주보다 3%포인트 하락한 30%였는데, 특히 TK에서 13%포인트 떨어져 낙폭이 가장 컸다.
이날 공개된 NBS(전국 지표 조사, 엠브레인퍼블릭ㆍ케이스탯리서치ㆍ 코리아리서치ㆍ한국리서치 공동 수행)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2주 전보다 3%포인트 떨어진 32%였는데, 부산ㆍ울산ㆍ경남의 낙폭(14%포인트)이 컸다.
여권 관계자는 “이른바 집토끼와 산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만만찮은 국면에서 박정희를 키워드로 박 전 대통령과 만난 것은 향후 펼쳐질 중도 확장 전략의 사전 포석”이라며 “현장을 중심으로 한 민생 행보, 인적 개편 등을 통해 중도층 공략도 본격화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kw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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