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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2주기에 여야 추모…“갈등·양극화 시대에 커다란 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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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 추도식이 26일 경기 파주 동화경모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중앙일보

26일 오후 경기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에서 열린 고 노태우 전 대통령 2주기 추모식에서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추모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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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측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고문 자격으로 추도사를 낭독한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고인은 시대 변화를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려 노력했다”며 “고인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우리나라 경제 성장 목표를 달성하는 동시에 소득 분배까지 이룬,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유일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고인의 업적인 ▶북방외교 ▶1기 신도시 건설 ▶KTX 건설 등을 언급한 후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을 만들었고, 국민 통합을 추진하는 일에도 모범을 보였다”며 “고인의 빈자리가 크다”고 했다. 김 전 위원장은 노태우 정부에서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이어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스스로 ‘보통 사람’을 칭하면서 담담한 자세로 역사의 큰 물줄기를 기꺼이 수용한 대통령의 유연한 정치는 오늘과 같은 갈등·양극화 시대에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첫 번째 북방외교 수교국인 헝가리의 새르더해이 이슈트반 주한 대사는 “전환기 북방외교에 나선 고인의 큰 뜻을 기억하겠다”고 했다.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노 전 대통령을 취재했던 박보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고인의 생애를 오비추어리 형태로 소개했다. 박 전 장관은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은 그에게 절정의 순간이다. 그날 그는 현충사로 이순신 장군 사당을 찾았다. 그는 영정에 참배하면서 역사와 대화를 했다”며 “그 장면은 세상을 뒤집는 승부사만이 연출할 수 있다. 민주화의 거대한 변곡점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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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경기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에서 열린 고 노태우 전 대통령 2주기 추모식에서 노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재단 이사장,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등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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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타협과 경청, 기다림’이 “노태우식 민주화 실천 수단”이었다며 재임 시절 ‘물태우’라는 비판을 듣던 당시 노 전 대통령이 했던 발언과 메모 내용을 소개했다. 박 전 장관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나의 귀가 큰데 들으라는 뜻 아닌가. 보통 사람의 시대라고 하지 않았나”라며 메모에 ‘참·용·기’를 적었다고 한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날 추도식에는 국민의힘 김 대표·윤재옥 원내대표, 대통령실 이진복 정무수석이 참석했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노영민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 등 야권 인사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등 해외 인사도 다수 자리했다. 고인의 자녀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비롯해 김현철 김영삼재단 이사장,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등 전직 대통령 자녀들도 참석했다.

■ 박보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고인 오비추어리

노태우의 휘파람 -그의 삶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들

❚‘노태우의 삶’은 다면적이다. 그 서사(敍事)는 격렬하면서 은근하다. 역설과 반전, 역전과 파란으로 구성됐다. 그 속에 세상을 신나게 만든 시절이 있었다. 어느 때엔 세상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영욕의 엇갈림은 긴박하면서 가팔랐다. 환호와 좌절이 유쾌하게 때론 거칠게 전개됐다.

그런 드라마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서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나는 고인에 대한 기억을 펼쳐보았다. 그 출발은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대표위원 시절이다.

휘~이~ 익. 휘파람 소리다. 베사메 무초 노래 한 소절이 이어서 휘파람 소리를 탄다. 애절한 듯하다가 경쾌하게 흘러간다. 그 모습은 나에게 각인됐다. 옆자리 어떤 당직자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노 대표의 휘파람은 전설적이다. 어린 시절 숲속에서 휘파람을 불면 새가 날아올 정도였다.”

그때 나는 정치부 초년병이었다. 고인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군인이 권위적, 명령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30년 군 생활을 ‘예술’로 생각했어요. 생과 사의 극단을 잇는 긴장과 드릴 만점의 예술이라고 여겼어요. ”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지도력은 그 속에서 탄생한다. 노태우는 자신의 리더십을 미학적 관점에서 연마했다. 그의 정치적 감수성은 다채로워졌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은 그에게 절정의 순간이다. 정치의 미학은 파격과 기습으로 극적인 장면을 생산한다. 그날 그는 현충사로 이순신 장군 사당을 찾았다. 그는 영정에 참배하면서 역사와 대화를 했다. 그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6·29 선언 문구처럼 국민이 ‘크게 웃는’ 계기였다. 그 장면은 세상을 뒤집는 승부사만이 연출할 수 있다. 민주화의 거대한 변곡점이었다.

❚‘노태우 시대’는 전환기였다.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시대였다. 그는 대란을 큰 정치, 대치(大治)로 휘어잡았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다시 선회한다. 고인의 이야기다. “내가 소대장, 중대장 시절 부대원들은 대학원생부터 무식꾼까지였다. 이런 다양한 집단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를 고민했다. 듣고 털어놓고 공통분모를 찾아야 원활한 지휘를 할 수 있다. 명령과 규율이 아닌 인간관계의 오묘한 예술이 지도력의 요체다. ”

그 오묘한 예술은 절제의 미학으로 그의 내면에서 득세한다. 절제는 인내와 경청을 요구한다. 민주화 체제로 가는 초입이었다. 격변기는 시끄럽고 불안하다. 강한 통치행위의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과도한 권력 행사는 새로운 갈등과 반목을 낳는다. 그는 지도력의 위상을 낮게 설정했다. 그는 타협과 경청, 기다림을 추구했다. 그것은 노태우식 민주화 실천 수단이다.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한꺼번에 건너뛰기는 쉽지 않다. 역사 발전에 필요한 단계·과정을 거치는 여러 징검다리 역할이 나의 소명이다.” 대통령 문화는 개조의 수준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혼란과 전진이 충돌하면서 공존했다. 갈등과 변혁이 배척하면서 어울렸다. 그 속에서 5·18 광주‘사태’는 ‘민주화 운동’으로 정체성을 다졌다. 권위주의적 구질서로의 회귀는 없었다.

징검다리의 인상은 느림과 소극적이다. 승부수의 과단성과는 거리가 멀다. 보수·진보, 좌·우 진영의 욕구가 분출했다. 양쪽에서 반발과 불만이 쏟아졌다. ‘물태우’라는 비판이 번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을 독려했다. “나의 귀가 큰데 들으라는 뜻 아닌가. 보통 사람의 시대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고독한 듯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휘파람 불 듯 은근하면서 거침없다. 그의 메모지에 ‘참·용·기’가 적혀 있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

❚‘노태우 드라마’는 복합적이다. 나는 고인의 연희동 집에 갔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다. 정원에서 그는 헤르만 헤세의 시를 읊었다. “가을날, 숲 가에 나뭇가지가 금빛으로 타오를 때··” 사과, 대추, 감, 살구나무가 서 있다. 그는 “내가 심은 나무들이다. 나는 향기 나는 것보다 열매를 맺는 나무를 좋아해요. 도전을 희망으로 심고 성취의 결실을 맛볼 수 있지요.” 그 말은 헤세의 향기로운 언어와 어긋난다. 그는 시적 감상을 차단하고 있다. 그의 내면은 복선이다.

결실은 실사구시적 야망이다. 노태우 방식의 어휘다. 그는 북방으로 도전에 나선다. 그의 국정 스케일은 광대해졌다. 한국 외교는 장기간 남방에 한정돼 있었다. 북쪽 대륙은 미지의 영역이다. 북방외교가 공세적으로 시작됐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현 러시아)과 중국, 헝가리 동유럽으로 달려갔다. 1990년 12월 노 대통령의 소련 방문은 국제정치 질서의 개편을 상징했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노태우-고르바초프 회담 장면은 한국의 역대 정상회담 중에서 가장 강렬하다.

88 서울올림픽은 국민과 함께 만든 치적이었다. 그것으로 한국의 국격은 급상승했다. 개발도상국, 냉전, 독재, 가난한 분단국가라는 평판은 상당 부분 퇴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는 100여 개다. 그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유일한 나라, 한국의 이미지가 전 세계로 경이롭게 퍼졌다. 88 올림픽의 주제는 ‘벽을 넘어서’다. 서울올림픽은 동유럽의 공산권 장벽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 올해로 서울올림픽 35주년이다. 하지만 우리 현대사에 그 독보적인 의미가 제대로 축적되지 않았다.

북방외교는 외교의 지평 확대에 머물지 않았다. 한민족의 진취적인 활동 공간은 넓어졌다. 그때부터 10년간 중국은 한국을 배우려고 했다. 한국인들은 천안문 광장을 힘차게 걸었다. 그런 장면은 수천 년 한중 관계에서 전무후무할 것이다.

❚‘노태우식 실사구시’는 인프라와 민생 쪽으로 뻗어갔다. 그가 남긴 인프라 공간은 넓다. 그 국정 유산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분당·일산 등 신도시 건설, 경부고속철도(KTX)·인천 신공항·서해안 고속도로의 착공이 그것이다.

그의 인천공항 기공식 연설문(1992.11)은 예언적이다. “아시아·태평양 시대, 동북아 지역 중심 공항으로 빛나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는 온고지신 자세로 국가경영의 지혜를 찾으려 했다. 경부고속철도 기공식 연설은 인상적이다. “과거에 경부고속도로건설 때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굳은 의지가 없었다면 결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착공하는 고속철도도 선진산업국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절제와 인내의 자세는 이어졌다. 고인은 그의 시대의 진면목을 선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대중이 진지하게 포착하도록 기다렸다. 언젠가는 공적과 과오에 대한 균형적 접근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는 역사의 순리를 언급하곤 했다. 노태우 시대에 대한 재평가의 흐름이 이제 뚜렷하게 형성됐다. 그의 시대는 리더십의 영감을 준다. 그의 삶은 정치적 상상력을 생산하다.

묘소로 오가는 길은 자유로(自由路)다. 자유로는 그의 임기 말(1992.9) 준공됐다. “한강을 따라 자유로를 뚫고 북녘땅을 한눈에 굽어보는 오두산정에 통일전망대를 세운 기쁨을 온 국민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 길은 그가 군인 시절에 구상한 것이다. 그와 자유로와의 인연은 길게 이어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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