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지하철 5호선 방화행 열차 안. 임산부 배려석 좌석이 비워져있다. 지난해 10월 서울교통공사가 임산부와 비임산부 296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9.2%가 임산부 배려석 운영 여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비워두기 정책과 관련한 문항에서는 임산부가 있을 때 양보하기보다 애초에 비워두는 것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70%에 달했다./사진=이병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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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너무 아파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어요."
10일 오전 8시45분쯤 서울지하철 7호선 노원역의 석남행 열차.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임산부라 앉으신 거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여성에게서는 임신부임을 증명하는 임산부 전용 배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은 잠시 민망한 표정을 짓다 자리를 피했다. 반대쪽에 마련된 임산부 배려석에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매년 10월10일은 임산부의 날이다.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고 임산부에 대한 배려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2005년 제정됐다. 18번째 임산부의 날을 맞은 이날 서울 시내 출근길 지하철 열차 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서로 다른 지하철 20칸을 확인해보니 지하철 내 임산부 배려석은 대부분 임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은 일반석 양 끝에 각각 마련돼 있다. 2013년부터 도입됐다. 다른 좌석과 달리 분홍색 시트로 덮여 있거나 좌석 아래와 좌석 뒤 차창에 임산부 배려석임을 안내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한 여성에게 "임산부 배려석인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묻자 "비어있으니 앉아도 되는 줄 알았다"며 "임산부가 오면 비켜줄 것"이라고 밝혔다. 임산부가 아님에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던 한 중년 남성은 인터뷰 요청에 화를 내며 자리를 옮겼다.
10일 서울 701번 버스 안. 좌석 옆으로 임산부 배려석이라는 안내 스티커가 부착돼 있다. 지하철보다 좌석 수가 적은 버스는 임산부들을 위한 자리가 더 열악하다./사진=이지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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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보다 좌석 수가 적은 버스 상황은 더 열악하다. 이날 오전 8시50분쯤 서울 은평구 대조동 불광역에서 진관동으로 가는 720번 버스 임산부 배려석에는 가방을 맨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버스 탄 승객은 모두 6명으로 한산한 편이었다.
20년째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박종운씨(60)는 "인식이 많이 바뀌어 지하철은 비워두는 경우가 있지만 버스는 그런 경우가 없다"며 "버스에는 '손잡이 꼭 잡아달라'는 안내방송만 나오는데 지하철처럼 '임산부가 있으면 양보해달라'는 멘트가 나오면 좀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741번 버스를 운행하는 50대 김용수씨는 "임산부가 타더라도 휴대폰을 보느라 고개를 안 돌려서 잘 안 비켜준다"며 "젊은 여성들은 양보를 잘하는데 남자들은 아는 체도 안 해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서울교통공사가 임산부와 비임산부 296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9.2%가 임산부 배려석 운영 여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비워두기 정책과 관련한 문항에서는 임산부가 있을 때 양보하기보다 애초에 비워두는 것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70%에 달했다.
/사진=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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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통계와 거리가 있다. 예전보다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인식이 확대돼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비워두자'는 캠페인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12월 출산을 앞둔 최모씨(34)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강남으로의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이용하다 얼마 전부터 택시를 타기 시작했다. 앉을 자리가 없을뿐더러 모르는 노인으로부터 위협을 당하면서다.
최씨는 "임산부 배려석에 대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한테는 임산부 배지를 보여주는 것도 소용이 없다"며 "한 번은 임산부석에 앉아 가는데 술 취한 할아버지가 '어디 젊은 사람이 앉아 있냐, 비켜라'고 옆 기둥 손잡이를 주먹으로 치며 협박한 적이 있다. 이후엔 그냥 택시를 타고 출퇴근한다"고 말했다.
임신 초기인 임산부들은 임신 여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자리를 양보받기 더 어렵다. 임산부임을 표시하는 '핑크 배지'를 소지품에 매달고 다니지만 상황은 비슷하다. 2주일 전 출산한 윤혜원씨(26)는 "임신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냄새 때문에 입덧 증상이 심했다"며 "임신 초기에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받은 경험은 없었다. 임산부 배려석 안내방송이 버스에도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 구로구에서 연신내로 출근하는 김여진씨(35)는 "임신 중기가 되고 배가 나오면 출산 경험이 있는 중년 여성들이 먼저 자리를 비켜준다"며 "지하철 내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사람들은 대부분 눈을 감고 있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고 오히려 임산부 배려석 옆 사람이 비켜주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임산부 배려석을 없애고 노약자석을 확대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그러나 임산부들은 그렇게 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신 6개월 차인 김모씨(33)는 "임산부를 위한 자리에도 못 앉는데 이를 없애고 노약자석에 앉으라고 하면 임산부들은 아무도 못 앉을 것"이라며 "임산부석을 '여성 전용 좌석' 정도로 생각하는 노인들이 많은데 지금처럼 분홍색으로 작게 표시할 게 아니라 '임산부석'이라고 더 크게 강조해 머쓱해서라도 못 앉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임신으로 인해 배가 나온 임산부들은 사람들이 임산부라는 사실을 금방 인지하지만 초기 임산부들은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며 "다른 교통약자들처럼 임산부 역시 우리가 배려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개선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지성 기자 sorry@mt.co.kr 최지은 기자 choiji@mt.co.kr 이병권 기자 bk223@mt.co.kr 이지현 기자 jihyun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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