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제재 해제 노리며 입지 좁아진 국제사회서 영향력 과시
푸틴과 에르도안 |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흑해곡물협정 재개라는 세계 식량 안정화와 직결되는 카드를 손에 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총 3시간에 걸쳐 정상회담을 했으나 전 세계가 기대했던 결론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곡물협정을 재개할 준비가 돼 있으며, 모든 협의 내용이 이행되면 즉시 실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사회는 러시아에 흑해곡물협정을 재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러시아의 요구를 먼저 들어줘야 협정을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 중에도 우크라이나의 흑해를 통한 안전한 곡물 수출을 보장하는 협정으로, 지난해 7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체결됐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협정에 따라 우크라이나 곡물뿐 아니라 자국 곡물·비료도 원활히 수출됐어야 하지만, 자국 관련 협의 내용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며 지난 7월 17일 협정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이날까지 50일째 오데사, 초르노모르스크, 피우데니(러시아명 유즈니) 등 흑해 항구들을 통한 곡물 수출을 못하고 있다.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세계 곡물 시장도 불안정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협정 철수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의 기아 위기가 커졌다고 비난하고 있다.
러시아는 흑해곡물협정 재개를 위한 조건으로 ▲ 러시아 농업은행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 시스템 재연결 ▲ 파이프라인 통한 암모니아 수출 재개 ▲ 농기계·부품 수입 재개 ▲ 러시아 선박·화물에 대한 보험 제한 해제 ▲ 러시아 비료 회사에 대한 제재 해제 등을 요구해왔다.
그러면서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즉시 흑해곡물협정에 복귀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기자회견하는 푸틴과 에르도안 |
협정 중단에 따른 세계 식량 위기를 우려한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이번 회담을 앞두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협정 재개를 위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서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농업은행의 SWIFT 재연결, 식품·비료 회사 자산 동결 해제 등 러시아에 가해진 제재를 일부 해제하는 방안이 담겼다는 외신 보도들이 나왔다.
이러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며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선 만큼 푸틴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푸틴 대통령도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시작하며 "곡물협정 논의에 열려 있다"고 말해 기대를 키웠다.
물론 요구 사항이 이행되면 즉시 협정에 복귀할 것이라며 가능성을 열어 두기는 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흑해곡물협정 재개라는 카드를 자신의 요구가 확실히 충족될 때만 쓸 것이며 그 이전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군사작전에 나선 이후 비판을 받으며 국제사회 내 위상이 떨어진 러시아가 식량을 무기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예를 들어 러시아는 흑해곡물협정 재개 여부와 관계없이 카타르·튀르키예 참여로 아프리카 빈곤국에 자국 곡물 100만t을 공급하는 계획과 아프리카 6개국에 곡물을 무료로 제공하는 계획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AP 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제재 완화를 모색하는 동시에 흑해곡물협정 중단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아프리카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의 개발도상국들을 대상으로 이미지 관리를 하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abb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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