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4 (일)

이슈 종교계 이모저모

'매질 지옥'서.... 학폭·사이비 종교 피해자들의 '초능력' 카타르시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초능력 소재 드라마 봇물... 올해 최소 8편
사회적 약자, 가족주의 '한국형 특징'... '묻지마 범죄' 등 절망적 현실 반작용
한국일보

이달 공개된 초능력 소재 드라마들. '경이로운 소문2'(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순), '기적의 형제', '무빙', '소용없어 거짓말' 속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들 모습이다. tvN 제공, 디즈니플러스 영상·JTBC 방송 캡처


#1. "야, 나와" 고3인 희수(고윤정)는 교실에서 친구의 머리에 물을 쏟으며 괴롭히는 일진 무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 뒤 학교 소각장으로 향했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일진 무리는 10여 명. 돌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려도 희수는 끄떡없다. 9일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된 한국 드라마 '무빙'에서 그는 다쳐도 바로 회복되는 재생 초능력을 타고났다.

#2. "내는 뭐 효도 안 하고 싶어서 안했는감유?" 적봉(유인수)은 명문대 출신으로 서울에서 번듯하게 사업을 하는 이장 아들과 비교되며 아버지한테 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다. 탐지견처럼 악귀에 씐 사람을 냄새로 찾아내는 능력이다. tv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2: 카운터 펀치'에선 초능력으로 세상을 구하는 영농후계자가 등장한다.
한국일보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2'에선 소를 키우던 청년이 교통사고 후 초능력을 얻는다. tvN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비주류에서 주류 된 '초능력 드라마'

안방극장은 요즘 '초능력자' 세상이다. OTT와 TV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K드라마가 넘쳐나고 있다. '무빙'과 '경이로운 소문2', '소용없어 거짓말'(tvN)을 비롯해 '기적의 형제', '힙하게'(JTBC) 등 이달 공개되거나 방송될 드라마만 5편. 올여름 종방한 '이번 생도 잘 부탁해'(tvN)와 가을 이후 방송될 '힘쎈여자 강남순'(JTBC)과 '마이 데몬'(SBS)까지 고려하면 올해 시청자를 찾아가는 초능력 소재 드라마는 최소 8편에 이른다. 10여 년 전만 해도 드라마 제작 시장에서 비주류로 여겨졌던 소재가 이젠 주류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웹툰 원작 드라마인 '재벌집 막내아들'과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을 통해 만화적 상상력에 친숙해지면서 초능력이란 소재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생긴 변화"(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라는 분석이다.
한국일보

드라마 '무빙'에서 고3인 희수(고윤정)는 학교폭력 가해자인 일진 무리와 혼자서 싸운다. 그는 다쳐도 바로 회복되는 초능력을 지녔다.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짜뉴스' 범람... 거짓말 가려내는 초능력까지

초능력을 다룬 드라마의 유행은 코로나19 팬데믹 후 커진 경제 위기와 그 혼란 속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 범죄가 잇따르는 비극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에서 초능력을 얻게 되는 주인공은 학교폭력 피해자와 소멸 위기의 지방에서 소를 키우는 청년('경이로운 소문2')이고 사이비 종교 학대 아동('기적의 형제')이며 '묻지마 폭력'에 주로 희생된 여성('힘쎈여자 강남순')이다. '슈퍼맨' 같은 초월적 존재가 아닌, 사회 시스템에서 보호받지 못한 약자들이다. 이런 비극적 현실을 초능력을 빌려서라도 뛰어넘고 싶어 하는 시대적 절박함이 드라마에서 초능력 발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대중문화 속 초능력의 유행은 사회 시스템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불신이 팽배해진 데 따른 반작용"이라며 "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한 현실 위안"이라고 진단했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초(超)불확실성의 시대에 초능력이 없으면 사회에서 생존하기 그만큼 어렵다는 집단적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해석했다.

'소용없어 거짓말'에선 거짓말을 분간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까지 등장한다. '가짜뉴스' 범람으로 사회적 갈등이 커지고 알고리즘 추천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며 그것만이 진실이라 믿는 '필터 버블'에 갇혀 소통이 단절된 현실의 거울이다.
한국일보

드라마 '기적의 형제'에서 강산(배현성)은 순간이동 등의 초능력을 지녔다. 그는 어려서 사이비 종교가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학대당한 소년이었다. JTBC 방송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초불확실성 시대 생존 위해선" 집단 무의식

드라마에서 초능력은 혈연을 통해 유전('무빙' '힘쎈여자 강남순')되고 유사 가족의 정서적 교감('경이로운 소문2')을 통해 극대화된다. 소설 '수상한 식모들'을 쓴 박생강 작가는 "한국의 초능력 소재 드라마는 해외 콘텐츠와 달리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휴머니즘이 강조되는 게 특징"이라고 봤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공동체 위기는 세계적 화두"라며 "이런 맥락에서 한국형 초능력물이 해외에서도 관심을 받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이로운 소문2'는 9일(플릭스패트롤) 기준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부문 시청 시간 1위다.
한국일보

드라마 '소용없어 거짓말'에서 목솔희(김소현)는 거짓말 탐지 서비스로 생활비를 번다. tvN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콘텐츠 업계는 초능력 소재 드라마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해 공개될 8편의 초능력 소재 드라마 중 5편은 웹툰 원작이 아닌 순수 창작물이다. 초능력 소재 드라마를 만든 한 스튜디오 관계자는 "팬데믹 등 답답한 현실에서 통쾌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스토리에 대한 시청자 수요가 커졌다"며 "제작비 한계로 초능력을 다룬 드라마 제작이 예전엔 꺼려졌지만 최근엔 K콘텐츠의 글로벌화로 제작비가 크게 상승하면서 활발히 기획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20부작으로 기획된 '무빙'엔 제작비로 약 500억 원이 들어갔다.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CG 등 영상 후반 작업비로 톱스타 출연료를 훌쩍 넘는 비용이 쓰인다"며 "초능력 소재 드라마들 제작이 잇따르면서 생긴 변화"라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