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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전두환과 노태우

[시시비비]'전두환 칼'로는 사교육 못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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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19년 전인 2004년 12월, 팔레스타인에 해외 취재를 갔다가 수도 라말라의 가정집을 방문했다. 중년 편모가 아들과 사는 허름한 주택은 이스라엘 공습의 잔해가 곳곳에 그대로인 서민 주거지역에 있었다. 회벽이 누렇게 바랜 집안에 변변한 가재도구가 없었는데 유독 아이 책상 위에 최신형 LG 데스크톱이 놓여 있었다.

LG가 한국 회사인 건 고사하고, 그녀는 한국이란 나라 자체를 몰랐다. 왜 이 컴퓨터를 샀느냐고 묻자 대답이 "최고급이라고 해서"였다. "아이 과외용이라 무리해서 좋은 걸 샀다"던 그녀의 뿌듯한 표정이 기억난다. 테러 집단으로만 보도되던 팔레스타인에도 국가학력고사 성적에 따라 들어가는 대학교 20여곳이 있고, 입시 사교육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내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는 부모의 마음은 '본능'이다. 학부모의 본능을 먹고 사는 사교육의 존재는 그래서 빈부와 동서고금 예외가 없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단속하면 음지로 들어간다.

역대 가장 강력했던 우리 사교육 대책은 전두환 국보위의 1980년 7·30 과외 전면 금지 조치이다. 경찰은 7·30 조치 2주 만에 과외 단속에 돌입했다. 5공 정부 내내 과외 단속의 서슬이 퍼렜지만, 당시 8학군 일부에는 단속이 비껴간 '음지의 카르텔'이 있었다. 요직에서 비호받던 '사회지도층' 일부가 자녀 학교 교사를 몰래 불러 과외를 시켰다. 하지만 부유층·특권층 불법과외 수사 발표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온 적은 없다.

이런 음지의 사교육이 여전하다면 이야말로 근절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비밀 과외'는 존재 자체가 없다. 한국 수험생 부모 전체의 자녀교육 본능이 떠받치는 양지의 거대 산업으로 사교육이 변모했기 때문이다. 스타 강사들은 시장 원리에 따라 몸값이 너무 올라서 힘이 아무리 세거나 돈이 많아도 독점할 수 없다.

지난달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킬러 문항 배제" 지시 직후 정부가 사교육 비리 단속에 나섰지만 결과는 초라하다. 서울시에 영업신고한 입시·보습학원만 7771개소인데(2021년 서울시기본통계연보), 이번 단속 실적은 잔챙이 33건이다. 국세청은 사교육업체 4곳과 1타강사 한 명의 세무조사에 착수했고, 교육부는 카르텔 24건과 부조리 4건을 적발했다. 양지에서 비즈니스 논리로 돌아가는 사교육에 수십 년 전 음지 단속하던 칼을 휘두르니 수박 겉도 못 갈랐다.

사교육이 변했으니 대응도 달라야 한다. 양지의 사교육 전체가 근절 대상은 아니다. 거대한 과열 산업을 구조조정할 수술 계획을 세우고 정교하게 집도해야 한다. 킬러 문항 하나에도 우왕좌왕하는 교육부에 메스를 쥐여줘서 될 일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방향을 제시하고 지휘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킬러 문항 지적 이후 한 달 가까이 추가 언급이 없다.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사교육을 다듬는 국정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를 바란다.



이동혁 사회부장 do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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