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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취재파일] '대안 호소 세력'이 '대안 세력'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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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적으로만 보면 여야 정당은 상호 공존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적대적 담론과 감정으로 충돌해 왔다. 그러나 별로 변한 것은 없다. (...) 사회경제적 이슈가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거나 혹은 비갈등적 이슈로 다뤄질 때 실제 정치 경쟁은 한정된 갈등 범위 안에서 추상적 가치와 명분에 의존하는 다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최장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2010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노 정치학자의 책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오늘날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 상호 공존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적대적 담론, 정밀하고 지속적인 논쟁 대신, 철 따라 달라지는 대형 어젠다 아래 벌어지는 양당의 싸움.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들도 있다. 오늘날 여의도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정치 세력들 뒤의 '진짜 현실'은 13년 전보다 더 복잡하고 자잘한 갈등의 균열선들로 갈라지게 됐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정규직-비정규직, 1%와 99%의 전선에서만 싸우지 않는다. 자신이 중소기업 비정규직이라고 밝힌 한 유튜버는 부업으로 유튜브 채널을 파서 배달 라이더들의 불법 주차 신고 영상을 업로드한다. '딸배 정의구현'이라며 달려드는 시청자들에게 언론과 학자들은 '약자 혐오'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러나 그 '약자 혐오'는 다국적 거대 플랫폼 기업의 조회수 계산 알고리즘을 거쳐, 언론과 학자들이 역시 또 다른 '약자'라고 분류하는 이들의 '수입'으로 치환된다. 출산은커녕 결혼하는 인구 비율도 드물어져 간다는 통계 뒤에서, 결혼 적령기가 언제냐를 두고 온라인상의 한남-한녀 대전이 벌어진다. '남자는 와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그들을 '도태남'이라 비웃는 이들이 세계 대전을 벌이는데, 이들은 또 한편 다른 전선에서는 같은 팀으로 참전해 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이제 더 이상 영화 속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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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는 사람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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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언론이 '강성 팬덤' 내지 '극단 지지층'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되어 정치 영역에 뛰어들기도 한다. 수박을 깨거나 문자폭탄을 보내고, 외국에 있다 돌아온 정치인 입국장에 버스를 대절해 나간다. 태극기와 성조기, 때로는 이스라엘기와 십자가를 들고 한여름 거리에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시간과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쫓기듯 지나가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정치가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할 거란 기대 자체를 접은 이들이 조용하지만 두텁게 자리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어느 정치세력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응답하는 30% 언저리의 숫자가 그들이다. 그리고 이 시장을 노려 '대안 정치 세력'을 자처하고 나선 이들이 또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재창당 선언 · 신당 창당…'제3세력'의 미래는? (SBS 8뉴스)

"노동·녹색 가치 함께 하지 않으면 곤란"…'외연'보다 '규합' 내세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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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정의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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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제3당으로서 현실적으로는 가장 '대안'에 가까운 외형을 갖췄으나, 정치적 영향력을 꾸준히 상실해 온 정의당이 지난 주말 선수를 치고 나왔다. 토요일 전국위원회에서 '재창당'을 결정한 것에 이어 일요일에는 이정미 대표가 직접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 "어제 당이 결정한 신당 추진안은 우리 기준에 부합하는 세력이라면 통합과 합당을 통해 새로운 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라면서도 "그러나 민주당과 국민의힘 거대 양당을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는 하나의 당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함께할 수 있는 정체성으로 '노동·녹색'을 제시했다.

이 대표는 통합과 재창당 방식에 대해서도 '정의당 해산은 없다'고 못 박으며 "당 대 정치세력, 당 대 정당의 상호 간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니, 합당이나 이런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잘라 말했다. 아무리 위기라고는 하지만 원내 의석을 보유한 20년 역사의 정당으로서 주도권을 쉽게 놓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의제별로 갈라져 있는 진보 정치세력을 규합해 보겠다는 생각이 읽혔다.

하지만 이 대표의 선명한 선언 뒤에는 고민도 엿보인다. 지난 재보궐 선거에서 원내 진출에 성공한 진보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 묻자 이 대표는 "진보당과는 기존에 하나의 당에서 분열하는 과정을 거치며 여러 아픔과 상처가 있었다"며 "인위적 통합보다는 내년 총선 과정에서 공동의 공천 전략 등을 추진하며 신뢰 토대를 하나씩 쌓아나가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의당 스스로도 '정체성 공유'를 재창당 요건으로 내세웠지만, '노동' 또는 '녹색'이라는 추상적 단어 뒤에는 어쩌면 사회적 갈등의 균열선보다 더 복잡하게 갈라져 있는지도 모를 진보 정치세력의 지형도가 자리하고 있다.

'과학기술' 양향자·'호남 편의점주' 영입 금태섭…다시 그으려는 균열선의 '기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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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 흔드는 양향자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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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또 다른 '제3세력'이 창당의 첫걸음을 뗐다. 고졸 출신으로 삼성전자 임원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력의 양향자 의원이 '한국의 희망'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연 것이다. 양 의원은 세계 최초의 블록체인 정당이라는 '한국의 희망' 창당 선언문에서 "우리가 꿈꿨던 나라는 보수의 대한민국도, 진보의 대한민국도 아니고 강남의 대한민국도, 강북의 대한민국도 아니다"라며 이제는 "좋은 정치ㆍ과학 정치ㆍ생활 정치가 만들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자"라고 말했다. 정파성과 지역성을 흩뜨린 토대 위에는 '과학기술'내지 '전문가 집단'이라는 상징을 내세웠다. 임형규 전 삼성그룹 신사업팀장, 김용석 반도체 공학회 부회장 등 반도체 분야 전문가와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 교수 등 학자그룹이 창당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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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 전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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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다른 미래를 위한 성찰과 모색'이라는 포럼 형태로 갈 길을 찾고 있는 금태섭 전 의원도 같은 날 1호 영입 인사를 발표했다. 편의점주이자 '봉달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곽대중 씨가 주인공이다. 곽 씨는 1974년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 31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곽 씨의 이후 이력은 '호남 출신'이 주는 정치적 연상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편집장과 데일리NK 논설실장 등을 맡았고, '봉달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자영업자의 시선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정치집단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노동과 녹색'이라는 기치로 기존 '진보 정치 세력'의 경계선에 들어와 있는 이들을 우선 묶어내겠다고 한 정의당과 달리, 양향자·금태섭 두 전·현직 의원들은 '균열선 다시 긋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최근 내놓은 '말'과 함께 이들이 향하고 있는 '발'을 보면 방향성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이들이 향하는 곳, 이들이 찾는 사람들을 보면 진보/보수, 영남/호남으로 그어져 있는 정치적 균열선을 어떻게든 흩트리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하지만 '영입 인사'로 제도권 정치인이 됐던 이들이 그리고 있는 지도는 아직 항공 지도에 가깝다. 토양의 굴곡과 질감, 식생 등이 얼마나 지도에 반영되어 있는지는 미지수다. 때문에 흡사 중세의 영주들처럼 지역 조직들을 붙잡고 있는 현역 의원들의 내심에는 '우리 도움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거야?'란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로부터 폭력배 내지는 사기꾼으로 치부돼 두들겨 맞고 있지만, 그간 축적해 온 활동 자산을 다시 한번 정치적 에너지로 발산코자 하는 시민사회 세력들도 아직은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다.

'대안 호소 세력'이 '대안 세력'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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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미래를 위한 성찰과 모색 포럼 인사말하는 류호정 의원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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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함께하는 진보 세력을 '규합' 하겠다고 나선 정의당. 하지만 여의도에서는 내부의 이견을 해결하지 못한 정의당이 사실상 심리적 분당상태에 이르렀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실제 정의당 소속의 장혜영, 류호정 의원은 최근 금태섭 의원의 포럼에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당 지도부와의 이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어려운 건 금태섭과 양향자 두 전·현직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치에 새 균열선을 긋겠다'며 바닥부터 숱한 고지전을 치렀던 노무현·노회찬을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같은 목표를 갖고 나선 금태섭·양향자에게 아직 '참전 용사'의 자격을 부여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이들은 아직 '대안 세력'이라기보다는 '대안 호소 세력'에 가깝다.

사실 이들의 정치적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는 정치 고관여층이 아닌 대부분의 시민들에겐 알 바가 아니다. 이 '알 바야?'라는 물음이 '알고 싶다'는 욕구로 바뀌기 위해선 이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와 함께, 싸울 힘을 보탤만한 '진영'을 세울 수 있는지도 분명해져야 한다. 불행히도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2023년의 우리는 '진영'을 형성하기엔 너무도 잘게 갈라진 갈등의 부스러기들 위를 딛고 살아간다. 함께 상사를 욕하던 세대 전선의 동지들은 자산 계급 전선에서는 '폭락이'와 '폭등이'로 갈라서 치열한 댓글 전을 치른다. 구내식당이 없는 5인 미만 사업장의 임시직들은 치솟은 배달비를 보며 플랫폼 노동자를 욕한다. 어쩌면 어느 인물이나 세력이 대변자를 자처하며 뭉텅 떼어내 갈 유권자의 덩어리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들 '대안 호소 세력'들의 꿈틀거림이 찻잔 속 회오리에 그치지 않으려면, 누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복잡한 갈등의 균열선들을 그럴듯하고 납득할만하게 이어 그려내야 한다. 이어진 균열선이 지도 위에서 경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그 땅에 '대안'이라는 이름이 붙고 선거전의 진영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독노선을 천명한 이들은 당분간 자신들이 발붙일 유권자들의 균열선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닐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제3세력' 이라는 이름표를 획득할 만한 거대한 영토를 누군가가 독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이들 세력들이 각자 획득할 균열선들을 이어 붙이려는 기획이 현실화할 때, '무당층'으로 표시되고 있는 이들은 비로소 제3세력의 '지지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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