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학살사건은 이번에도 짧은 단순 언급에 그쳐
방재백서는 일본 정부가 재해대책기본법에 따라 1963년부터 매년 발행해온 백서로, 올해는 간토 대지진 발생 100주년을 맞아 당시의 피해상과 대책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이를 특집으로 다뤘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16일 발표한 방재백서에 따르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수도권인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은 규모 7.9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9.0보다 작았다.
그러나 당시 지진으로 인한 직접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무려 10만5천명으로 동일본대지진(1만8천명)의 5.8배에 달했다.
인명 피해 중 9만명은 화재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제 피해 규모도 당시 국민총생산(GDP)의 약 37%에 달해 동일본대지진(3%)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충격이 컸다. 실제 전파되거나 전소된 주택은 29만채로, 동일본대지진(12만채)의 2.4배 수준이었다.
이는 그동안 집계된 정부의 각종 통계와 논문 등을 토대로 한 것이다.
방재백서에 실린 간토대지진과 동일본대지진 피해 비교표 |
당시 정부의 대처도 형편없었다. 조직적인 구호 배급체제는 발생 닷새 뒤인 9월 6일부터 가동됐다. 이에 따라 지진 발생 하루 뒤에는 공원 등에 모인 피난민 중 공적인 음식 배급을 받은 인원이 10명 중 1명꼴에 불과했다고 한다.
사실 간토대지진은 일본의 방재 정책에서 일대 전환점이 된 재해였고 일본 정부도 당시 재해 대응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찾는 노력을 보여왔다.
지진 다음 해인 1925년에는 건축물법 시행규칙의 구조물 강도 규정이 개정됐고 이에 맞춰 지진 관련 규정이 세계 처음으로 제정됐다. 도쿄제국대학에는 지진연구소가 설립돼 일본이 지진학으로 큰 발전을 이루는 발판이 됐다.
현재 일본 정부가 정한 '재해의 날'도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에 맞춰 정해져 있다. 이날을 낀 8월 30일부터 9월 5일은 방재 주간으로 중앙정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방재훈련과 행사 등을 치른다.
간토대지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또 있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불을 질렀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퍼지며 수많은 조선인이 자경단, 경찰, 군인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만 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다. 진상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방재백서도 조선인 학살 사건은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전체 41쪽의 특집 분량 중 5문장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라디오도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폭탄 투척, 방화 등에 대한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는 조사보고서가 과거 나온 적 있다는 설명 정도에 그쳤다.
ev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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