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6 (화)

이슈 세계와 손잡는 K팝

엔하이픈의 ‘페어 안무’는 왜 팬들을 화나게 했을까[K팝 머글의 덕후 도전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7인조 보이그룹 엔하이픈. 빌리프랩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흔히 ‘덕질 DNA는 따로 있다’고들 합니다. 타고난 기질에 따라 덕질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뉜다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덕후’와 ‘머글’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릅니다. 머글에게 덕후의 언어는 마치 외국어 같습니다. 수시로 진화를 거듭하는 K팝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콘텐츠 소비의 개인화가 심화하면서 이 간극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덕후 DNA가 없더라도 ‘학습’은 할 수 있습니다. ‘K팝 머글의 덕후 도전기’는 이 간극을 줄여보는 코너입니다. K팝 세계의 트렌드와 토막 상식을 전합니다. 덕후는 못 되어도, ‘좀 아는’ 머글은 될 수 있습니다.

※머글 :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유래한 단어로 마법사가 아닌 보통의 인간을 가리킨다. 현재는 특정 분야를 깊이 파는 ‘덕후’(오타쿠)의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지난달 말,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앞에 여러 대의 트럭이 줄지어 세워졌다. 트럭에 설치된 거대 LED 전광판에는 보이그룹 엔하이픈 팬덤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번쩍였다. ‘여자 댄서 페어 안무 완전 삭제’ ‘일곱 명만 무대 세워’. 2020년 11월 데뷔한 7인조로 최근 활동을 재개한 이 그룹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엔하이픈은 지난달 22일 미니 4집 앨범 ‘다크 블러드’로 컴백했다. 10개월 만의 컴백에 팬들은 반색했다. 그런데 신곡 ‘바이트 미’가 공개되자 팬덤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바이트 미’는 운명의 상대와 재회한 소년이 자신과 소녀가 피로 연결된 운명임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팝 장르 곡이다.

팬들의 분노에 도화선이 된 것은 이 곡의 퍼포먼스였다. 엔하이픈 멤버 7명은 이 곡에서 7인의 여성 댄서들과 짝을 맞춰 추는 ‘페어 안무’를 선보였다. 2분38초 길이의 노래 중 후렴 부분을 포함해 절반 이상의 안무를 멤버와 댄서들이 함께 소화한다. ‘저스트 컴 키스 미 앤드 바이트 미’(그냥 다가와서 나를 물어줘)라는 가사에 맞춘 듯 댄서가 멤버의 턱을 쓰다듬는 등 신체를 밀착하는 동작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팬들은 즉각 반발했다. 컴백 다음날인 23일 성명을 내 안무 수정과 퍼포먼스 디렉터 교체를 요구했고 같은 내용의 트럭 시위로도 이어졌다.

시위 내용이 알려지자 당장 팬덤을 향한 차가운 시선이 나왔다. 이성인 여성 댄서들을 질투해 일단 반대하고 보는 것 아니냐는 질타가 이어졌다. 실제 이성애에 기반한 일종의 ‘유사 연애 감정’은 ‘덕질’의 주된 동력 중 하나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걸그룹과 달리 강력한 팬덤 확보로 수익을 올리는 보이그룹의 경우 이런 경향이 더 강하다.

오랜 시간 여러 보이그룹을 두루 덕질해 온 A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돌 세계관에는 그들(멤버들)과 섹슈얼한 교감을 할 수 있는 이성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룰이 있어요. 이 룰은 팬덤 뿐 아니라 업계에서도 공유하고 있는 듯 하고요.”

K팝 특유의 ‘퀴어함’도 이 룰과 관련이 있다. K팝 팬덤 문화 중 하나인 ‘팬픽’은 동성 멤버 간 애정 관계를 큰 축으로 한다. 팬픽 속 로맨스에 제 3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룰라, 샵 같은 혼성 그룹이 2000년대 들어 K팝에서 자취를 감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현재 활동 중인 혼성 그룹은 2017년 데뷔해 주로 해외에서 활동 중인 카드(KARD)가 유일하다.

하지만 팬들은 ‘멤버들이 여성 댄서와 춤추는 것이 싫다’는 이유 만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멤버와 동일한 수의 댄서들이 무대에 오르면서 무대 구성이 복잡해지고, 정작 멤버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등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성인 댄서와 밀착해 이뤄지는 안무가 미성년인 멤버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향신문

엔하이픈의 ‘바이트 미’ 뮤직비디오 장면. 여성 댄서와 일대일로 춤을 추는 페어 안무가 들어가 있다. 뮤직비디오 갈무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안무 수정을 요구하는 팬들의 속내가 어느 쪽이냐와 별개로, 이번 사례는 K팝 산업 내 팬덤의 독특한 위상을 보여준다. 한 보이그룹의 팬인 B씨는 “팬덤 문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질투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 팬덤은 그룹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그들의 성장에 자신들을 투영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콘셉트나 활동 방향성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팬덤의 역할이 더 이상 단순한 팬에 그치지 않는 데 따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엔하이픈의 이번 앨범은 발매 첫 1주일 132만장을 팔아치우며 자체 신기록을 경신했다. 음악방송 1위도 했다. 지난 1일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1위를 차지한 엔하이픈은 “엔진(팬클럽 이름) 여러분을 위해 이번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시고 상까지 받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안무와 관련한 논란에도 팬들은 결집해 앨범을 사고, 음원을 듣고, 투표를 했다. K팝 팬덤은 충성도 높은 팬임과 동시에 산업의 한 주체로서 좋아하는 그룹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생산자-소비자’로만 설명되지 않는 독특한 관계가 유지되는 한 K팝 창작자들의 비슷한 고민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 삼성 27.7% LG 24.9%… 당신의 회사 성별 격차는?
▶ 뉴스 남들보다 깊게 보려면? 점선면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