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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가상자산 리스크가 ‘전통 금융’ 흔들까…시그니처은행 파산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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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자산 거래소 빅3 FTX 파산 뒤 시그니처 평판 흔들

시그니처 예금자산 23.5%가 가상자산 업체에서 유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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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티엑스(FTX)와 가상자산을 둘러싼 극심한 긴장감이 아니었다면 (시그니처은행이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바니 프랭크 전 시그니처은행 이사, 지난 3월14일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인터뷰)

올해 미국 지역은행들이 연달아 쓰러진 것을 두고 ‘가상자산 리스크’의 전염성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뜨거워지고 있다. 주로 가상자산 생태계와 친밀하게 지냈던 은행들이 문을 닫은 탓이다. 지난해 11월 있었던 가상자산거래소 에프티엑스의 파산이 일부 지역은행 위기를 촉발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가상자산 위기는 다른 데로 확산되지 않고 가상자산으로 끝난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는 주장이다. 시장에서는 물론 금융당국에서도 전통 금융시스템과 가상자산 간의 연결고리를 되짚어보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전염성이 꽤 강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 가상자산 규제를 둘러싼 논의도 전환점을 맞을 전망이다. 가상자산 리스크가 은행 같은 전통 금융회사들로 전이될 수 있는 경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는 가상자산 규제에 있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따져봤다.

‘FTX 파산’이 은행 위기로?…연결고리 따져보니


4일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보고서를 보면, 가상자산과 시그니처은행 사이에는 ‘평판 리스크’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3월 매각된 시그니처은행은 가상자산 업체들이 예치한 예금을 기반으로 성장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개중에는 전세계 3위권 가상자산거래소 에프티엑스의 예금도 있었다. 자산이 2017년 말 431억달러에서 2021년 말 1184억달러로 175% 불어날 정도로 성장 속도도 빨랐다. 미국 은행권에서 시그니처은행의 순위(자산 기준)는 같은 기간 40위에서 29위로 올랐다.

올해 위기를 맞기 전까지만 해도 시그니처은행은 가상자산 리스크로부터 자유롭다는 입장이었다. 지난해 이른바 ‘크립토 윈터’(가상자산 하락장)가 찾아왔을 때도 시그니처은행은 이 지점을 역설했다. 은행이 가상자산 업체들의 예금을 유치한 것이지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게 아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가상자산과 관련된 신용위험, 즉 돈을 떼어먹힐 위험에는 노출돼 있지 않다는 논리였던 셈이다. 지난해 11월 에프티엑스가 파산했을 때도 시그니처은행은 보도자료를 내고 “시그니처은행과 에프티엑스 간의 관계는 예금으로 한정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지난해 가상자산 생태계가 흔들리면서 시그니처은행의 평판도 함께 나빠졌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투자자나 예금주들의 심리도 함께 위축돼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했다. 나스닥에 상장된 시그니처은행의 주가는 ‘크립토 윈터’가 닥친 지난해 1년간 63.6% 폭락했다. 같은 기간 나스닥지수가 33.1% 빠진 것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에프티엑스가 파산하고 가상자산에 친화적인 실버게이트은행이 문을 닫는 등 가상자산과 관련된 악재가 발생할 때마다 시그니처은행도 크게 흔들렸다. 연방예금보험공사는 “가상자산의 불확실성과 변동성으로 인해 시그니처은행은 평판·유동성·규제 위험에 더 취약해졌다”고 분석했다.

공통된 고객층이나 투자자층도 연결고리로 작용할 수 있다. 에프티엑스는 투자자 중에서, 또 시그니처은행과 실리콘밸리은행(SVB) 등은 예금주 중에서 벤처캐피탈의 비중이 높았다는 특징이 있다. 에프티엑스에 수십억달러씩 투자했던 세쿼이아 캐피탈 등 유명한 벤처캐피탈 업체들은 하루아침에 대규모 인출 사태로 회사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우려에 대한 벤처·벤처캐피탈 업계의 민감도를 훨씬 높이는 계기가 됐을 수 있다. 이들 업계가 상당 비중을 차지했던 최근의 뱅크런은 “전례가 없는 수준의 속도”(연방준비제도)로 이뤄졌다.

“전염성 낮다”던 미국 당국도 경계 태세


미국 금융당국이 가상자산 생태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읽힌다. 연준은 올해 2월까지만 해도 에프티엑스 파산 등의 사건이 전통 금융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연준의 크리스토퍼 월러 이사는 “지금까지 가상자산 산업의 스트레스가 다른 금융시스템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미미했다”며 “이는 가상자산 생태계와 은행시스템 간의 상호 연결고리가 상대적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연방예금보험공사도 일부 은행의 예금 구성이 가상자산 생태계에 치중된 점을 문제삼지 않았다. 공사에 일반적인 금융감독 권한은 물론 예금보험자로서 행사할 수 있는 고유의 감독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함의가 적지 않다. 지난해 9월 말 시그니처은행 예금의 23.5%가 가상자산과 관련된 예금이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미국 지역은행들이 연달아 쓰러진 직후다. 연방예금보험공사는 시그니처은행을 플래그스타은행에 매각하면서 한 가지 예외를 뒀다. 가상자산과 관련된 시그니처은행 예금 40억달러는 플래그스타은행에 넘기지 않았다. 공사는 그 까닭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행여 해당 예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겼다가 위기가 전염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지역은행 위기가 가상자산 생태계 내 불안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고 진단한 셈이다.

이로 인해 은행 위기를 진화하는 데 든 비용이 증가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시그니처은행에 쓴 돈은 25억달러로 추산됐는데, 가상자산 관련 예금도 다른 은행에 매각했다면 이 금액은 훨씬 작았을 가능성이 높다. 연방예금보험공사는 시그니처은행 등 최근 무너진 지역은행들의 예금을 전액 보장하고 있다.

전염성 크다면…가상자산 규제 강화해야 할까


가상자산 위기의 전염성을 둘러싼 논의는 결국 규제 강도와도 연관된다. 가상자산 생태계의 위기가 전통 금융시스템으로 옮아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면 이런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관리감독이 필요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가상자산 관련 입법 흐름은 대부분 이보다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불공정거래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지난달 우리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도 주로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행위를 규율한다.

앞으로는 분위기가 달라질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특히 지난해 파산한 업체들이 가상자산 생태계에서 은행과 유사한 신용공급 기능을 했음에도 관련 규제를 비켜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 업체는 고객 예금의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 금액으로는 직접 투자를 하거나 다른 고객에게 대출을 해줬다. 예금 인출 요구가 급증하거나 자산 운용 과정에서 대규모 손실이 날 경우에 파산할 가능성이 높은 구조지만, 이에 대한 대비도 부족했다. 지난해 에프티엑스와 더불어 가상자산 대출업체 ‘셀시어스 네트워크’와 ‘보이저 디지털’도 고객들의 잇따른 인출 요구에 맞닥뜨리며 파산했다.

일각에서는 은행에 적용되는 것과 비슷한 건전성 규제를 가상자산 생태계에 부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손실흡수능력을 담보하기 위한 각종 자본·유동성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동일 차주에 대한 신용공여 규모를 제한하는 등 신용위험 관리를 강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지난해 9월 뉴욕 연방준비은행 실무진은 ‘디지털 자산의 금융안정 시사점’ 보고서에서 “유동성 규제나 예금보험 등이 없는 상태에서 은행처럼 위험한 행위에 나서면 대규모 예금 인출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감독과 공시, 자본·유동성 규제를 적용하면 가상자산 생태계 내 기업들의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짚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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