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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거장의 마지막 시선은 ‘희망’이었다···칸에서 만난 켄 로치[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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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올드 오크’ 칸영화제서 첫선

폐광촌 주민과 이주 난민들이

갈등 끝에 ‘연대’로 나아가는

‘영국 북동부 3부작’ 최종판

은퇴 관련 질문 쏟아지자

“나는 86세, 더 일할 수 없어”

경향신문

지난 27일 제76회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켄 로치가 자신의 신작 <디 올드 오크>의 포토콜 행사에서 두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칸|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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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동부 더럼의 어느 폐광촌에 승합차 한 대가 들어온다. 히잡을 쓴 짙은 피부색의 가족이 조금은 들뜬 얼굴로 내리고, 주민들은 이를 싸늘하게 지켜본다. 적개심을 감추지 않던 한 주민은 급기야 가족의 첫째 ‘야라’의 카메라를 빼앗아 내동댕이친다. “왜 하필 여기야? 너희 나라로 돌아가!”

자본주의와 국가폭력이 소외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50년 넘게 영화에 담아온 영국 감독 켄 로치. 그의 ‘마지막 시선’이 향한 곳은 난민이 정착한 폐광촌이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디 올드 오크>(The Old Oak)는 지난 25일(현지시간) 제76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베일을 벗었다. 그의 영화가 칸 영화제에 초청된 것은 이번이 15번째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두 번 들어올린 거장을 이날 프랑스 칸 시내의 한 레지던스 호텔에서 만났다. 5성급 호텔이 즐비한 도시에서도 세계적인 감독은 원룸 형태의 소박한 숙소를 택했다.

<디 올드 오크>는 한때 번성했지만 쇠락해가는 폐광촌에 시리아 난민이 정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디 올드 오크’는 마을에 남은 유일한 펍이다. 주민들은 매일 이곳에 모여 고단함을 푼다. 곤두박질치는 집값과 불어나는 빚, 하나둘 문을 닫는 공공시설 같은 걱정을 이곳에서 오랜 이웃들과 마시는 맥주로 잠시나마 잊는다.

펍의 주인이자 전직 광부인 TJ 밸런타인(데이브 터너)은 한때 마을의 중심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함께 축구를 했고, 노동조합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광산이 문을 닫고 마을이 망가지면서 그 역시 희망을 잃는다. 그에게 남은 즐거움은 아끼는 반려견 ‘마라’를 산책시키는 것 뿐이다.

절망만 남은 마을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10년대 후반의 어느 날. 내전을 피해 시리아에서 온 난민 가족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다. 가뜩이나 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은 분노한다. ‘우리(Our People)’가 설 자리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한편 이민에 반대하는 것도, 인종차별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항변한다.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누군가 손을 내민다. TJ와 난민 가족의 첫째 딸 ‘야라’(에블라 마리)는 망가진 카메라를 계기로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의 우정은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삶에 조금씩 변화를 불러온다.

<디 올드 오크>는 로치 감독의 ‘영국 북동부 3부작’ 마지막 작품이다. 영국 북동부는 철강, 석탄 등 2차 산업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시간이 흘러 산업이 쇠퇴하면서 쇠락한 지역이다. 로치 감독은 빠르게 무너져가는 이 지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은퇴한 목수와 싱글맘이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소외되는 택배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미안해요 리키>(2019)는 모두 이 지역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로치 감독은 비극으로 끝나는 두 영화와 달리 이번 작품을 통해서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2016년 시리아 난민이 처음 영국에 온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을 보며 그는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디 올드 오크>는 시리아 난민들이 오기 시작했을 때 상황을 담은 영화입니다. 난민들은 거대한 적의와 마주해야 했어요. 물론 지금도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지만 (주민들과 난민 간) 좋은 관계도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에는 켄 로치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스토리는 단순하고 메시지는 간결하다. 감독이 오랜 시간 일관되게 강조해온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저항은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길거리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등장인물들도 그대로다. 주인공 TJ를 연기한 데이브 터너는 실제 영국 북동부 주민이다. 전문 배우가 아닌 소방관 출신으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 촬영 당시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에게 지역을 소개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극중 시리아 난민들은 모두 실제 난민으로 내전을 피해 영국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영화 속 지역 주민들 역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섭외했다.

로치는 6개월에 걸쳐 이 지역 사람들을 직접 만나 사연을 듣고 캐스팅했다. “규모가 크고 복잡한 작업이었습니다. 감정적으로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어요. 시리아 난민들은 현명한 사람들이고 그들과 일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연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니 늘 신경써야 했죠.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에게는 무엇이 진실인가요?’라고 물었어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거짓이니까요.”

이와 같은 작업 방식은 영화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동시에 현실의 복잡함도 반영하게 했다. 영화는 난민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마을 주민들이 단순한 ‘혐오자’가 아닌 같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민과 난민들은 사실 같은 처지예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죠. 광산 노동자들은 1980년대 파업을 통해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산업이 무너지며 정치적으로도 약해지죠. 당국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뭉친 이들의 커뮤니티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요. 영화 초반부에 주민들이 펍에 모여 난민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장면은 일부 사실이기도 해요. 실제로 학교에서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난민 아동들을 신경쓰느라 영국 아이들의 교육은 뒷전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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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감독의 신작 <디 올드 오크>의 한 장면. ‘디 올드 오크’는 영국 북동부 한 폐광촌의 유일한 펍 이름이다. 식스틴 필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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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유일한 펍 ‘디 올드 오크’는 마을 사람들이 매일 모여 맥주를 마시며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지역사회가 무너져가는 가운데 시리아 난민들이 이곳에 정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불만을 드러낸다. 식스틴 필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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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 ‘야라’는 펍 주인 TJ와 함께 지역사회를 회복할 방법을 고민하다 펍을 활용할 방법을 제안한다. 식스틴 필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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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와 감독은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한다. 로치 감독은 “사람들은 (제대로 된 교육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 국가가 아니라 난민 아동들을 비난한다”며 “극우 세력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분열”이라고 지적했다.

인자한 얼굴의 로치 감독은 정치, 경제, 국제 정세를 이야기할 때면 청년 같은 혈기를 보였다. 백발의 노인인 그의 안에 여전히 분노와 저항의 정신이 살아있는 듯 했다. 유럽 곳곳에서 득세 중인 극우 정당에 대한 비판하면서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기도 했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끔찍합니다. 극우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같아요. 큰 기업들에는 지원을 하면서 노동 계급에게 쓰여야 할 돈은 줄이죠. 교육, 전기, 교통 같은 공공 서비스는 모두 파괴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들이 필요해요. 그들 없이는 먹지도, 입지도 못합니다.”

1967년 <불쌍한 암소>로 데뷔한 로치 감독은 반 세기 넘는 시간 동안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뤄왔다.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빵과 장미>를 비롯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 등 그의 영화는 시대별 노동자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됐다. 아일랜드 독립 투쟁과 스페인 내전을 각각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랜드 앤 프리덤>을 통해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비판을 담기도 했다.

<디 올드 오크>로 현재 유럽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난민 문제를 다룬 로치 감독은 그러나 이번 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지난달 영국 가디언지에 “단기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고 시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날도 눈 건강을 이유로 햇빛을 등지고 앉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날 인터뷰에서는 그의 은퇴 여부를 묻는 질문이 이어졌다. 2014년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번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로치 감독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에요. <디 올드 오크>를 찍는 기간은 나에게 그 해 최고의 시간이었죠. 하지만 나는 지금 86세이고 다음달이면 87세가 됩니다. (삶이) 몇 년이나 남았겠어요? 현실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어요.”

은퇴를 선언했지만 세상을 향한 관심은 여전했다. 영국 국내 정치부터 최근 그리스 정부가 아프리카 난민 가족을 보트에 태워 바다로 떠민 사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까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관한 우려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평생 응원해온 축구클럽 FC 배스 시티의 경기도 꾸준히 보러다닌다고 했다. 그러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였다.

“종류는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문제는 항상 같습니다. 지배 계급에 대한 투쟁이죠. 좌파 세력이 숫자는 적지 않지만 흩어져 있어요. 이 세력을 모아 단결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만드는 것. 내가 바라는 바가 한 가지 있다면 그것입니다.”

<디 올드 오크>는 국내 수입됐으며, 개봉 시기는 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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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 영화 감독 켄 로치가 지난 25일(현지시간) 제76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린 프랑스 칸의 한 레지던스 호텔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뒤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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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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