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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지금, 여기] 어느 강사의 즐거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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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강 중인 대학원에서 재임용 대상자 안내 메일을 받았다. 별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 두 해 동안 학생들과 함께 비평과 시각문화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꽤 머뭇거리며 승낙한 강의였지만, 솔직히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정규 강의를 맡은 것은 10여년 만의 일이었다. 공부가 얕고 부족한 탓이라며 짐짓 겸손한 척을 하고 싶지만, 대학원을 갓 졸업한 나를 이끌고 난해한 원전을 한 줄 한 줄 강독해 주셨던 스승들을 생각하면 그럴 면목은 없다. 시종일관 즐거웠던 배움의 시간은 오히려 내게 어떤 두려움을 남겼다. 즉 세상에는 바닷가에 있는 모든 조약돌을 뒤집어 보듯 텍스트를 읽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땅에 떨어진 남의 깃털을 주워 아무리 몸을 장식하려 해도 결국 누군가에게는 들킨다는 것을 그때 나는 배웠다.

경향신문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이 두려움의 감각은 여러 유혹으로부터 나를 철조망처럼 지켜주었다. 그러다 보니 직장을 다니면서도 꽤 열심히 읽고 쓰고 강의해 온 편이다. 아무리 짧은 글을 쓰더라도 많은 텍스트를 읽지 않으면 불안했고, 반대로 읽는 일을 게을리할까 두려워 대부분의 원고와 강의 청탁을 수락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는 서툰 자전거꾼의 왼발과 오른발처럼 불안과 걱정은 나의 공부를 낯설고 외진 곳으로 이끌었다.

외래교수나 겸무교수라는 이름으로 대학에서 강의한 적도 두어 번 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며 한 학기의 정규 강의를 여유롭게 이끌어나가는 것이 조금 버거웠다. 매번 지나치게 많은 준비를 했고, 적당히 힘을 빼는 법을 몰랐다. 게다가 강사법 시행 전후로 많은 동료들이 시간강사 자리마저 잃은 상황에서 직장에 다니는 ‘4대 보험 보유자’가 겸임교수 제안을 넙죽 받아들이는 것도 조금 망설여졌다. 무엇보다도 계통적 질서와 일반론에 입각한 너른 공부보다는, 좁고 뒤틀리고 날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내게는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해 전, 나는 자신에게 이런저런 변명을 하며 대학원 강의를 시작했다. 시각문화와 디자인, 현대미술이 중첩되는 영역에서 수십 년 전 탄생한 기이하고 뒤틀린 텍스트들을 명민한 학생들과 함께 읽을 기회를 놓치기는 어려웠다. 개강일이 되면 나는 수업과는 별 상관없는 저널리스트 리샤르트 카푸시친스키가 이란 혁명을 취재하여 쓴 책인 <샤 중의 샤>의 한 구절을 읽어 준다. 이 글에는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에 대한 아름답고 정교한 묘사가 있다. 카푸시친스키에 따르면 그것은 시위대의 끝에 선 이가 곤봉을 보고도 두려워하며 도망치지 않는 순간이다.

덜 부담스러운 강사가 되겠다는 목표와는 어째 잘 안 맞는 심각한 낭독을 마친 나는 ‘필사적으로’ 웃으며 말을 건넨다. 자, 이제부터 좀 괴상한 글들을 읽게 될 거예요. 당연히 이해가 잘 안 갈 거고, 모르는 단어가 수두룩하게 나올 겁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다들 여기서부터 시작하거든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의 선배들도 그랬고. 다만 나는 실기 전공자니까, 프랑스어나 영어를 잘 모르니까, 철학이나 사회학 수업을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하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석사 논문이든 위키피디아든 끈질기게 찾아보다 보면 그 모호한 순간에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시작될 거예요. 그리고 모르는 거 물어보라고 선생이 있기도 하니까.

어리둥절해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스승들과 함께 공부하던 10여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그분들처럼 좋은 선생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솔직히 연구자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긴 호흡이 필요하고, 그 성장을 뒷받침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 역할은 아니다.

스승들에게 배운 텍스트의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에 맞서는 작은 방법들을 전할 수 있다면 족하다. 두 해의 시간을 얻은 강사는 기쁘게 웃으며 학생들을 바라본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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