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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이슈 미술의 세계

고독한 사나이 고흐는 왜 정신요양병원으로 가야했을까 [전승훈의 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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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여행(3) 고흐 그림 따라 아를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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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 시내를 관통하는 강은 론강이다. 밤에 론강 변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돈 매클린의 팝송 ‘Vincent’의 가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흐가 론강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처럼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기다란 그림자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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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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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는 고흐가 고갱과 함께 살던 ‘노란집’(Yellow House)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곧바로 강가로 향하면 5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다. 고흐는 저녁에 론강변을 산책했을 것이다. 봄철이라 저녁에 되자 미스트랄 바람(프로방스 지역 산에서 내려오는 특유의 지역풍)이 거셌다. 론강의 강물이 파도를 치는 것처럼 찰랑찰랑 너울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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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아를의 론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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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하늘에는 샛별이 낮게 떠 있고, 무수한 별들이 반짝거렸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정확한 장소를 찾아갔더니, 그림 속 성당도 보이고 둥그렇게 돌아가는 강변의 모습이 똑같았다. 고흐 그림 속에는 집집마다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강물에 번졌을텐데, 지금은 론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가로등 불빛이 길게 일렁이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나는 지금 아를 강변에 앉아 있다. 별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걷고 있어.”(‘반 고흐, 영혼의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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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 론강변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곳에 있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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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그림 따라잡기


인상파 화가들이 살던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 튜브 물감이 발명됨에 따라 인상파 화가들은 실내가 아니라 화판과 팔레트, 물감과 붓을 들고 다니며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인상파 화가들이 살던 도시에 가보면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특정 지점을 만난다. 그림과 현장을 번갈아 비교해가면서 내가 화가가 된 듯한 기분으로, 그 시점으로 돌아가 현장을 바라보는 것은 여행의 특별한 즐거움이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 그림을 보고 난 후, 모네가 살던 지베르니 집의 정원에 가보시길. 수련이 피어 있는 연못 위에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그림이 그려진 장소를 찾아 사진을 찍고 또 찍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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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은 35세의 고흐가 1888년 2월부터 1889년 5월까지 약 15개월간 머물렀던 도시다. 아를 시내 곳곳 길바닥에는 고흐가 걷는 모습이 그려진 동판이 붙어 있다. 이 동판을 따라가면 고흐의 그림 속 장소가 하나둘씩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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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약 2년간 무명의 화가로 생활했던 고흐는 남프랑스의 따스한 햇살이 빛나는 아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파리에서 알던 몇몇 화가들과 함께 공동으로 집을 빌리고, 아뜰리에를 꾸며서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꿈꾼 것이다. 아를에서 그는 고갱과의 만남과 불화, 귀를 자르고 병원에 입원하고, 동네에서 쫓겨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겪지만, 이런 힘겨운 삶 속에서도 불굴의 창작을 계속한다. 그는 아를에서 ‘밤의 카페테라스’ ‘아를 병원의 정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원형 경기장’ ‘해바라기’ 등 유화 200점, 드로잉과 수채화 100점 등 3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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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살던 아를의 노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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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작은 고흐가 살던 ‘노란집’(Yellow House)다. 기차역과 론강 사이의 광장에 있는 이 집은 고흐가 약 6개월간 살았던 집이다. 그 중에서 고갱과 살았던 기간은 단 두달간. 고흐가 노란집 자기 방을 그린 그림과 고갱을 위해 그렸던 해바라기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이 광장 앞에는 고흐가 그린 ‘노란집’ 그림이 세워져 있다. 고흐가 살던 노란집은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부숴졌으나, 그림 속 굴다리 위 기찻길은 현재도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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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옆에는 카페가 있었는데, 고흐가 아를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카페의 여주인이었던 지누 부인(Madame Ginoux)이다. 고흐는 지누 부인을 ‘아를의 여인(Arlesienne)’이란 이름으로 여러차례 그림으로 그렸다. 고흐 그림 속에서 지누부인은 프로방스 전통의상을 입고 책을 놓고 앉아 있는 정숙한 부인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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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가이드 프랑수아 씨가 고흐의 투우경기장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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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를의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투우 경기 그림에서도 고흐의 절친인 지누부인과 우체부가 등장한다. 아를의 투우 경기는 스페인 전통 투우와 게임의 룰이 다르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소를 칼로 찔로 죽이는 장면으로 끝나는 반면, 프랑스 아를에서는 여러 명의 투우사가 성난소를 피해다니며 소의 뿔에 묶인 리본을 많이 떼내가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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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200여 통의 편지를 부쳤던 시청 앞 광장 우체국을 지나서 포룸 광장으로 향한다. 고대로마 시대 도시의 각종 이벤트가 펼쳐졌던 포룸광장 한쪽에는 고흐의 단골카페가 있다. 그는 이 곳에서 ‘밤의 카페 테라스’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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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따뜻한 불빛 조명이 비친 벽을 노랗게 그렸는데, 푸른색 밤하늘의 별과 대조돼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래 벽이 노란색은 아니었고, 조명을 받은 부분을 노랗게 그린 것이다. 이 곳은 현재도 ‘반 고흐 카페’로 영업 중이다. 그런데 그림 속처럼 벽을 온통 노랗게 칠하고, 뒤쪽 건물에서는 푸르스름한 조명까지 비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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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창백하리만치 옅은 하얀 빛은 그저 그런 밤 풍경을 제거해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지.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어.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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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카페가 조명의 디자인과 벽에 새겨놓은 글씨까지 그림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이 놀랍다. 고흐는 노란 벽면에 어두운 곳에 음영을 표현할 때는 초록색으로 칠했는데, 실제 이 카페에는 벽면에 노란색과 초록색을 칠해놨을 정도다. 지난달 초 포룸광장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투우 페스티벌 전야제여서 포룸광장에서는 밤새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맥주를 마시는 파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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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다툼 끝에 파리로 떠난 후 고흐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자신의 귀를 잘라 종이에 쌌다. 그리고 사창가의 여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여인이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여성이라는 설도 있고, 매춘부가 아닌 세탁과 설겆이 일을 도와주던 여성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론강의 어부들이 자주 가던 술집이 몰려 있는 곳은 노란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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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빨간집’(La Maison Rouge)은 꽃가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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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이 곳에서 ‘빨간 집’(La Maison Rouge)라는 상호를 가진 가게가 있다. 혹시 고흐가 찾아간 그 여인이 있던 집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빨간집’은 현재 꽃가게였다.
고흐가 종이에 싸서 준 선물에 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여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고흐는 일단 귀에 입은 외상 치료를 위해 아를 시립병원으로 이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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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병원은 현재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라는 이름의 고흐 기념관이 됐다. 병원의 1층 정원에는 분수와 연못 주변에 형형색색의 꽃이 심어져 있는데, 고흐가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정원을 그림으로 그렸다. 정원에 세워진 그림을 보니 고흐가 그린 시점은 1층이 아니라 2층 병실 복도에서 내려다본 느낌이었다. 그래서 2층 중앙에서 약간 왼쪽 지점으로 가보니 그림과 정확히 일치하는 각도를 찾을 수 있었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병원의 외벽과 기둥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노란색이 칠해져 있다. 당시 실제 병원의 외벽이 노랗게 칠해져 있지는 않았겠지만, 현재 이곳은 고흐의 그림처럼 샛노란 색으로 칠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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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병원의 정원(Le jardin de l’Hotel de D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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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병원에서 귀를 치료한 고흐는 한달만에 다시 노란집으로 돌아왔으나, 동네사람들의 민심은 흉흉했다. 사람들은 고흐를 위험인물로 봤다. 자신의 귀를 자해하고, 손수건에 싸서 여인에게 줄 정도의 끔찍함이라면 다른 사람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고흐를 마을에서 내쫓고, 격리 시켜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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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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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를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가이드 프랑수아 씨는 “아를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던 친구였던 지누 부인과 우체부마저 고흐를 내쫓아달라는 청원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고흐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흐의 정신적 병이 더욱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만일 지누 부인이 청원서에 서명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고흐에게는 고갱과 다투었을 때보다 더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받았을 때 외로움은 배가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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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레미 정신요양병원이 있던 생폴드모솔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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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흐는 동생 테오의 권유대로 아를의 노란집을 떠나 생레미 정신 요양병원에 지진입원한다. 생 레미는 아를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프로방스의 알피유 산맥의 줄기에 있는 숲이 우거진 생 레미에는 트레킹 코스가 있어 봄을 느끼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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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레미 정신요양병원이었던 생폴드모솔 수도원의 회랑식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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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1년 가까이 머물렀던 생레미 정신요양병원은 원래 중세 때부터 있었던 ‘생 폴 드 모솔’ 수도원이었다. 이 병원이 본래 수도원이었다는 사실은 아치형 기둥으로 둘러싸인 회랑식 정원(Cloister Garden)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생레미 정신요양병원은 지금은 고흐의 발자취를 담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짝마른 몸의 고흐가 화구를 들고 서 있는 청동 조각상이 서 있다. 내부 방에는 고흐가 입원해 있던 병실의 침대와 욕조 등이 그대로 재현돼 있다. 병원 주변의 산책로에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벚나무, 들판과 집 등 고흐의 그림 속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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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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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생 레미에서도 하루에 1편 이상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고흐는 생레미에 입원해 있는 동안 동생 테오 부부가 조카를 낳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테오는 아들에게 형의 이름을 따라 빈센트라고 이름을 지었다. 고흐는 조카의 탄생 소식을 기뻐하며 ‘꽃이 핀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푸른색 바탕에 벚꽃처럼 하얀 아몬드 나무 꽃이다. 생폴드모솔 수도원의 정원에는 고흐의 그림을 보명 산책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고흐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 그림에는 생명력 넘치는 봄날의 프로방스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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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흐가 이 곳에서 그린 대표작은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이다. 아침에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린 이 그림에서 사이프러스 나무는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밤하늘의 별빛이 파도처럼 흘러간다. 고흐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언덕과 구름, 집과 나무, 밤하늘과 별빛을 바라보는 자신의 황홀경의 감정을 그림 속에 가득담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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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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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루마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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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은 아를에 새롭게 지어진 ‘루마(LUMA) 아를 뮤지엄’에 의해 건축적으로 재해석됐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었던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신작이다. 외벽을 1만1000개의 알루미늄 패널을 벽돌처럼 쌓아 올린 4개의 은빛탑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하늘로 솟아올라 간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림 속 사이프러스 나무처럼 타오르고 있다. 외벽은 햇빛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면모하는데, 특히 밤에 조명이 들어오면 환상적이다. 건물의 푸르스름한 외관은 고흐의 그림 속 밤하늘이 되고, 오랜지색 조명이 들어온 창문은 맴도는 별빛이 된다.

아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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