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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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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게 다가 아니야…작정하고 낯설게 보여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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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로랑 그랑소 'Future Herbarium'(2022). 페로탕


귀를 때리는 파이로폰(유리관 속에서 가스를 태워 음을 만드는 19세기 악기) 소리를 따라간다. 영험한 기운이 깃든 숲속을 담은 영상 '아니마(Anima)'(2022)가 어둠 속에서 퍼지면 양쪽 벽에 걸린 은판 회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겹쳐 그려진 꽃의 형상이 마치 샴쌍둥이처럼 묘하다.

2008년 마르셀 뒤샹상 수상으로 주목받은 프랑스 대표 현대미술가 로랑 그라소가 페로탕 도산파크에서 개인전 '아니마'를 통해 펼쳐 보인 신묘한 세계다. 사물을 정치활동의 주체로 새롭게 정의한 과학인문학 창시자 브뤼노 라투르로부터 영감을 받아 환경사학자 그레고리 케네와 협업한 결과물이 영상에서 회화, 조각 등으로 뻗어 나왔다.

주제작이라 할 18분짜리 영상은 프랑스 알자스 지역 생트오딜 산의 영험한 기운을 가득 담고 인간과 여우, 바위 등 다양한 시선이 교차한다.

인간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여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장면이 어우러진다. 후반부에 화면이 전복되면서 나무와 돌의 내부로 투시되는 장면에서 실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자율주행차의 눈처럼 쓰이는 라이다(LiDAR·레이저 광선을 발사하고 그 반사와 흡수를 이용해 측정하는 광학장치) 스캐너로 인간 시각을 넘어서는 장면을 보여주고 숲 한가운데 떠 있는 구름과 함께 끝난다. 영상 요소들이 등장하는 회화와 조각이 전시장 곳곳에 잔향처럼 흩어져 있다.

전시장 입구에 나뭇가지처럼 걸린 청동과 네온 조각 '파놉테스'(2022)는 가지 끝에 많은 '눈'을 달고 있다. 나무에도 인간 못지않은 지성과 영을 지닌 존재가 숨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연작 '과거에 대한 고찰(Studies into the Past)' 신작들도 펼쳐졌다. 전문 회화 복원사들과 협업해 17~19세기 고전 회화처럼 재현했는데 아치형 건축물에 구름이나 불꽃 등 이질적이고 기이한 형상이 괴이하다. 초현실주의 회화 같기도 하면서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헷갈리게 만든다. 작가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거짓된 기억'을 주제로 펼쳐온 작품으로 의도적으로 제작 연도나 작가 서명을 없애 시간성을 모호하게 했다.

영상과 조응했던 은판 회화 '미래의 식물표본실' 연작에선 데이지나 국화 등 여러 종의 꽃들이 미래에 나타날 돌연변이를 보여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접하고 발전시켰다고 한다. 은판은 '수소의 금'이라 불리는 친환경 원자재 팔라듐을 사용했다.

전속 갤러리인 페로탕이 2016년 삼청동 서울점 개관전에 작품을 선보이며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작가는 "한국은 첨단 기술과 샤머니즘이 만나는 곳이어서 나의 작업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다만 일부 작품은 2021년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전 재연 같아 아쉽다.

전시는 오는 6월 17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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