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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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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창조주’ 안돼!… 대구시립예술단, 베토벤 ‘합창’ 공연 무산 전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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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아트센터 재개관 기념 공연 앞두고

종교화합 자문위원 특정 종교 편향 지적

홍준표 대구시장, 종교화합자문위원회 폐지 및

시립예술단 종교 편향 방지 대책 마련키로

최근 대구에서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대구시립예술단이 다음 달 1일 대구 수성아트센터(수성아트피아) 재개관을 기념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공연하기로 했다가 특정 종교 편향 논란이 불거지면서 무산된 것이다. ‘악성(樂聖)‘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합창’은 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꼽히기도 한다. 특히, 독일 대문호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여 인류의 평등과 형제애를 합창으로 염원하는 4악장은 합창 교향곡의 하이라이트다. 그런데 왜 대구시립교향악단과 합창단은 이 곡을 무대에 올릴 수 없게 된 걸까.

세계일보

수성아트피아 전경. 수성아트피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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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대구시 등에 따르면, 지난달 서면으로 진행된 대구시립예술단 ‘종교화합 자문위원회’에서 한 자문위원이 4악장 가사 중 ‘신’, ‘창조주’, ‘천사’, ‘천국’ 등의 가사를 문제 삼아 종교적 편향성을 지적하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2021년 개정된 대구시립예술단 설치 조례에 따라 시립예술단은 공연 프로그램의 종교 중립성 확보를 위해 종교계 4명을 포함해 학계·법조계·문화계 전문가 등 9명으로 구성된 종교화합 자문위원회를 두고 있다.

조례를 보면, 자문위 역할은 △예술단 정기공연 프로그램 등의 종교 중립성에 관한 사항 △종교 간, 종교계와 예술계의 화합·발전을 위한 협력 방안에 관한 사항 △그 밖에 종교적·사회적 논란이 될 수 있는 사항을 자문하는 것이다. 자문위원회 안건 의결은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을 충족해야 한다. 단, 종교 중립성과 관련된 안건의 경우 출석한 종교계 자문위원이 모두 찬성(만장일치)해야 의결된다. 대구시립예술단 공연 중 조금이라도 종교 중립성과 관련된 공연이라고 판단돼 자문위원회 논의 테이블에 올려질 경우 종교계 자문위원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공연할 수 없다는 얘기다.

현재 종교계 자문위원 4명은 기독교·불교계 쪽 2명씩인데, 불교계 위원 1명이 시립예술단의 합창교향곡 공연에 제동을 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대구 지역 예술인들이 지난 20일 “ 종교화합 자문위원회의 결정은 검열이고, 예술의 자유를 침해한 일”이라며 ‘공연 금지 철회’를 촉구하는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예술 작품에 대한 종교적 성향을 검열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는 물론 종교 화합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공연 무산 위기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수성아트피아 측은 부랴부랴 다른 연주 단체를 물색한 뒤 어렵게 구미시립합창단과 대구오페라콰이어를 섭외했고, 준비 기간이 촉박해 합창 교향곡 전곡 대신 4악장과 드보르작의 ‘축제 서곡’ 등을 추가해 공연하기로 했다.

전국 광역단체 중 대구시에만 종교편향 공연을 막기 위한 자문위원회가 있는 등 이런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 발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대구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기독교 신학대학 출신 지휘자가 오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합창단 정기연주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공연이 불교계를 자극했다. 그해 12월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가 대구시에 문제를 제기했고, 대구시는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듬해 정기연주회 앙코르 공연과 대구 합창제전에서도 찬송가 여러 곡이 연주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불교계 내부에선 “대구시립합창단이 교회 성가대냐”는 비판이 쏟아졌고, 대구 동화사와 대구불교총연합회 등은 반발 목소리를 높이며 대구시를 항의방문했다. 이에 당시 대구 부시장이 조계종 총무원을 찾아 사과하고 종교편향 예방 자문회의 설치 등 재발방지 노력을 약속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해당 지휘자는 물러났다.

대구시 관계자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시립합창단인데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때도 아니고 일반적인 정기연주회와 합창제에서 찬송가 공연을 잇따라 하니까 종교 편향 논란이 됐던 거”라고 했다.

그렇게 한동안 시립합창단의 종교 편향 논란도 누그러졌으나 2021년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대구시립합창단의 창단 40주년 기념 및 정기연주회 ‘오페라 합창의 향연’ 작품 속 가사에 기독교적 내용이 일부 포함되자 불교계가 다시 발끈했다. 특히, 부처님오신날 전야인 5월18일에 창단 40주년 기념음악회 앙코르공연을 하기로 한 데 대해 동화사 측은 대구시를 찾아가 “이웃종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거세게 항의하며 당시 권영진 대구시장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재발방지대책 등을 요구했다. 대구시 관계자는 “시립예술단은 공공예술 기능을 갖고 있는 단체인 만큼 활동할 때도 종교·정치·이념적 중립성을 유념해야 한다(그런 점에서 당시 합창단은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결국 대구시는 시립예술단체들이 종교 중립성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종교화합 자문위원회 설치 및 운영 방안 등을 담는 내용으로 관련 조례를 개정했다. 조례 내용 중 특히 ‘시립합창단은 공연 전 자문위원회에 프로그램의 종교 중립성에 관한 자문을 거쳐야 하며, 그 밖의 예술단은 필요한 경우 자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주목된다. 잇단 종교 편향 논란을 야기한 시립합창단만 콕 집어 자문위의 공연 프로그램 사전 검토를 의무화한 것이다. 예술단은 ‘필요한 경우’에만 자문을 받도록 한 것과 큰 차이다.

요컨대 불교계 입장에선 종교 중립성을 준수해야 할 공공 예술단체가 종교편향 논란에도 불구하고 계속 빌미를 제공하면서 사태를 키운 것이다. 이로 인해 종교적 불신이 쌓이면서 대구시가 ‘종교화합’이란 취지로 자문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술에 ‘사전 검열’이란 족쇄를 채운 셈이 됐다. 음악 역사상 최고 교향곡으로 평가받는 ‘합창’마저 유탄을 맞게 될 정도로.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식으로 종교 중립성을 문제 삼아 하나 하나 따질 경우 국공립 예술단체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와 문화는 기독교와 떼어놓을 수 없어 음악과 미술 등 예술 작품에 기독교적 색채가 녹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예술에 불교적 색채가 담긴 작품이 많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예술 작품을 대하는 사람 대부분이 종교적 색채와 관련해 거부감을 갖지 않는 건 예술을 그 자체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번 베토벤 ‘합창’ 공연 무산 소식에 예술인과 클래식 애호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황당해 하거나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다.

세계일보

홍준표 대구시장.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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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는 논란이 확산하자 시립예술단 종교화합 자문위원회를 폐지키로 했다. 대구시는 이날 “종교 중립성과 관련된 안건에 대해 종교계 자문위원 전원 찬성으로 의결하는 현 제도는 사전검열 기능을 수행해 예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조항으로 판단, 시립예술단 설치 조례상 종교화합자문위 조항을 삭제키로 했다”고 밝혔다. 자문위 삭제 조항은 입법예고와 시의회 조례안 심사를 거쳐 오는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다만, 시립예술단이 종교 편향적 공연으로 사회적 물의를 야기할 경우 작품 선정에 책임 있는 예술감독은 징계위원회 의결을 거쳐 해촉하기로 하는 등 종교 편향 방지대책을 별도로 수립해 시행키로 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예술단으로서 종교 중립 의무 준수는 필수인 만큼 실효성 있는 시립예술단 종교 편향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예술계·종교계 간 소통과 화합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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