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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월)

[스프] 귀촌 선택한 전 항공사 승무원, 최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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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각은 여전…제 인생이 낭비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코로나19로 맺은 춘포와의 인연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 시골에 올 리 없었다. 다니던 여행사는 주로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던 곳이었다. 코로나가 터지자 중국 관광객이 뚝 끊겼다. 사드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지만 코로나19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할 일이 없는데 사무실에 나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일이 없으니 급여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사무실도 문을 닫았다. 이 사태가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여행사 대표는 지방으로 가서 게스트 하우스 같은 것을 운영하면서 버텨보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지방에 혼자 가서 살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서울에서 딱히 할 일이 없으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사는 고양이 말고는 자신이 직접 챙겨야 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딱히 잃을 것이 없어서 오기 쉬웠던 것도 있었어요. 제가 여기 오기 전까지 뭔가를 이루어 놓은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직업이 뚜렷했던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모든 것에서 실패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난다고 제가 포기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여행사 대표가 멀지 않은 친척이었고 몇 년 동안 같이 일을 하면서 쌓인 신뢰가 있었다. 새롭게 일을 하게 된 전북 익산 춘포리는 가본 적은 없지만 고향인 익산시에서 차로 20분 거리여서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밀려난다는 느낌은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었다고 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고, 서울을 떠나는 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멀리 여행을 온 듯한 마을, 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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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만경강 변에 있는 춘포리는 한 세기 전 세워진 교회와 초등학교가 있고,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역사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 유적이 마을 곳곳에 있는 것을 빼면 외양으로는 평범한 시골 농촌 마을이다. 오지는 아니지만 마켓 컬리나 쿠팡의 새벽 배송은 안 되는 곳이다. 전주와 익산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어 도시에서는 가까운데, 일단 마을에 들어서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40대는 말할 것도 없고 50대 주민도 찾아보기 힘들다. 주민의 대부분이 60-80대이니 동네 주민들이 몇 천 원 주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일 년에 손을 꼽을 정도이고 외지인들이 이 동네를 일부러 찾을 일은 거의 없는 곳이다.

지난해 가을 우연히 그 카페에 들렀다. 한눈에 봐도 도회지 냄새 물씬 풍기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여행사, 항공사 직원으로 일하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저런 사람들이 왜 여기 와서 카페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시 감성의 카페는 한적한 그 동네와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두세 번 더 그곳을 찾았다. 찾을 때마다 카페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고 무엇보다 그 가게 하나로 동네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져 갔다. 여기까지 내려온(?) 청년들이라면 사연이 적지 않을 듯싶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청년, 지방, 요즘 트렌드라는 귀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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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8일 카페 대표 최혁과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고 그다음 주 토요일인 4월 15일 카페 운영자 최희서를 만났다. <카페 춘포>에 도착할 때까지 마을에서 마주친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동네는 한적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카페 춘포>는 주문을 받는 곳, 음료를 마시는 공간, 그리고 회의와 소규모 강연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페 옆에는 게스트 하우스 <금촌농장>이 있다. 건물이나 인테리어는 소박하고 깔끔했다. 유채꽃이 활짝 핀 텃밭에서 카페 대표 최혁이 구슬땀을 흘리며 땅을 다듬고 있었다. 주말이 역시 가장 바쁜데 3시 반쯤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두세 팀의 손님이 보였다. 게스트 하우스와 카페를 최희서와 최희서가 언니라고 부르는 신나영 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나를 치유하고 힐링해 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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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 카페> 공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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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적한 동네에서 이렇게 바쁘게 살 줄 몰랐단다. 이 마을에 온 것이 2021년 12월, 그때부터 4개월 동안 동료들과 카페와 게스트 하우스 개업 준비를 했다. 카페 건물을 짓고 게스트 하우스 내부를 수리하는 것은 전문가의 손을 빌렸지만 어지간한 것은 최혁, 신나영, 신웅재 등 동료들과 직접 했다. 카페 집기를 구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실내 인테리어를 직접 챙겼다. 카페 간판을 도안, 제작해서 직접 달았고 마당에 잔디 깔고 디딤석을 만드는 일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춘포커피', '쌀라테' 같은 메뉴 개발은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신나영의 몫이었고 카페 인테리어는 디자인 담당인 이 사람, 최희서가 주로 맡았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이 났다. 카페 개업 준비 과정을 사진과 함께 개인 블로그에 거의 매일 올렸는데 그게 제법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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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여행사 다닐 때는 이렇게 열심히 안 했는데 여기 와서는 열심히 한 거 같아요. 일단 저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잖아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또 이거는 정답이 있진 않잖아요. 회사 일은 실수가 있으면 안 되지만 여기 일들은 실패하면 다시 해도 되잖아요. 그리고 어쨌든 우리 거니까 누구 눈치 안 봐도 되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카페가 문을 연 것이 지난해 4월 하순, 그 직후에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됐다. 개업 타이밍이 좋았던 셈이다. 개업한 지 이제 일 년이니 성과를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 대보둑이라고 불리는 만경강 강둑은 전주에서 익산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자전거 라이더들에게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만경강 제방 바로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이 카페는 강둑을 달리는 라이더들의 입을 통해 소리 소문 없이 퍼져갔다. 지난겨울에는 천연기념물인 칡부엉이 일곱 마리가 이 카페 마당 나무에서 서식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이 칡부엉이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많은 돈을 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손해는 보지 않는다. 게스트 하우스는 주말에는 예약하기가 힘들 정도고 카페도 손님이 없어 멍하니 보내는 시간은 없다. '면사무소 직원, 매일 출근 도장 찍는 택배회사 사장, 춘포 주민 할인해 달라고 소리 지르는 할저씨, 좋은 향기를 풍기는 중년 여인, 사진 찍기 위해 나들이 나온 젊은 커플 등'이 고객이다. 동네 주민은 전체 손님의 10% 정도, 나머지는 소문 듣고 찾아온 외지인들이다.

지난 해만 네 차례 방송에 소개가 되었고 한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된 동영상은 조회수가 150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연주회, 기업체 강연회가 열렸고, 청소년 교육 공간,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공간으로도 사용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섭외해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 전시회를 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물론 외지인들까지 찾아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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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서 씨가 제작한 춘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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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서 씨가 제작한 춘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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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꾸미고 메뉴를 개발하는 것 외에 마을 홍보에도 열심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경력을 살려 마을 지도와 춘포 관련 포스터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자기 손으로 동네 곳곳에 붙이고 다녔다. 지도에 나온 장소의 특성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나름 고민했다. 그런 고민 때문이었는지 이 사람이 그린 지도를 보면서 여기 우리 집 있다고 반가워하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마을을 알리는 스티커, 팸플릿도 제작해서 곳곳에 뿌렸다. 마을의 역사를 알기 위해 동료들과 공부를 하고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이 카페가 소문이 나면서 이 동네를 찾는 외지인들이 늘고 마을 분위기가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나도 당신들처럼 귀촌하고 싶은데 조언을 구한다는 말도 종종 듣고, 특히 이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 당신들 덕분에 우리 동네가 괜찮은 동네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처음에는 저희 공간을 알리는 것도 목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 춘포라는 곳을 진짜 알리고 싶었어요. 여기는 만경강도 옆에 있고, 동네가 조용하고 그냥 깔끔하고 그렇더라고요. 돌아다녀보면은 구석구석 예쁜 곳도 있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춘포에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하기도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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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지분을 가진 것은 아니다. 최혁과 그의 부인 신나영이 이 카페 주인이지만 자신을 종업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여도 정해진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매월 결산을 해서 수익의 일부를 나누는 방식인데, 많을 때도 월 2백만 원을 넘기지 못하고 30만 원이 안된 적도 있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이니 경제적인 것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월세 포함해서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이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지방이니 그 돈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에서 보람을 느낀다. 이런 보람은 지금껏 살면서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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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NCCK,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한국기독교 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한국 기독교계의 거물이었고 아버지는 기자, 어머니는 아나운서로 일했다. 1986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뒤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살다가 중학교 때 서울로 간 이후 20년 넘게 서울에서 지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 2010년부터 항공사 승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꿈이 외교관이었을 만큼 낯선 세상에 대한 관심이 크다. 항공사 승무원은 세상의 곳곳을 누비고 다니고 싶은 마음에 택한 직업이었다. 승무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 좁은 세상에서, 틀에 박힌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원하던 직업이었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직업은 아니었다. 3년 만에 승무원을 그만두었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 삶은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았다. 하고 싶은 일은 많았는데 정작 해낸 일은 많지 않았다. 일도 어려웠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마을로 오기 전까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묻지는 않았지만 이러저러한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2015년엔 주로 중국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여행사에 들어갔다. 호텔을 예약하고 교통편을 챙기고 관광객 일정을 짜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규모가 작은 여행사여서 내 일, 네 일의 구분이 없었다. 일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뜻이 잘 맞았다. 최혁, 신나영, 김나현 등이 그때 만나서 지금까지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춘포에 온 이후 자신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바쁘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박수 쳐주고 호응하는 사람들이 주는 힘 덕분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모처럼 느끼며 산다. 그러니 커피 값 안 깎아준다고 투덜대면서도 찾아오는 주민들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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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가 주는 치유의 효과도 있다. 만경강 강둑에서 춘포 들판을 달리는 기차를 바라볼 때 행복하다. 만경강 낙조를 보고 강변 갈대들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여기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여섯 마리의 고양이들을 돌본다. 남들에게는 낯을 가리는 춘포의 고양이들이 자기에게 기꺼이 곁을 내주고 자신에게 안길 때 여기를 쉽게 떠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맞춰 밥을 챙겨주고 자기 돈 들여 중성화 수술도 시켜줬다. 이 사람이 블로그에 올리는 고양이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이 카페를 찾는 손님도 있다.

"엄마가 저를 누구보다 잘 아시거든요. 여기 와서 네 얼굴이 훨씬 더 좋다. 그런 이야기 많이 하세요. 저 스스로 봐도 서울에 있을 때는 매일매일 앞날 걱정하면서 우울한 일기를 쓰면서 살았는데 여기 와서는 별로 그런 게 없어요. 여기 와서 치유받고 힐링되는 느낌입니다."

- 혹시 본인이 루저, 패배자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까.

"있죠. 엄청 많죠! 저는 사실 자기 비하도 많이 해요. 한때 그런 자기 비하에 빠지는 시기도 있었어요. 근데 여기에 오고는 그 주기가 되게 길어진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만약에 뭐 6개월에 한 번 그랬으면 여기서는 뭐 아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청년들이 동네를 바꾸고, 동네는 청년을 바꿨다



지난가을에는 이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팔았다. 정미소에서 받아온 쌀을 카페에 진열해서 팔기도 했고 온라인 판매도 했다. 최혁이 쌀을 팔아보자고 했을 때 우리들에게 누가 쌀을 사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성과가 적지 않았다. 10킬로 포장 쌀 200여 포대를 팔았다. 받아온 가격 그대로 팔았으니 남는 돈은 없다. 오히려 쌀을 사 오고 쌀 포대에 스티커를 제작하고 붙이느라 생고생을 했지만 이 마을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어 기뻤다.

"처음에는 쌀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맛이 정말 좋더라고요. 이 동네가 원래부터 쌀 맛이 좋기로 유명한 동네였더라고요. 마침 그때 쌀값이 폭락해서 동네 곳곳에 이에 항의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농민 살리기 차원에서 우리도 뭔가를 하자!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게스트 하우스를 하면서 코로나 시기를 넘기려던 생각으로 왔던 곳이지만 이제는 이 동네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가끔 인생의 승부를 여기에서 한 번 볼까 싶은 생각까지 한다. 서울이나 경기 같은 곳에 있었다면 이런 관심과 시선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할 때는 냉철했다.

- 서울이나 경기도 같은 곳이라면 이런 성과를 못 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청년들에게 기회는 지방에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맞아요. 지방이니까 가능했고, 저희는 저희 나름의 차별성 있는 스토리가 있는 거 같아요."

-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저희 카페가 그렇게 번쩍번쩍하고 아주 편리하지는 않잖아요. 요즘 돈 많이 들인 카페가 엄청 많은데 여기는 잔디도 저희가 심고 돌도 우리가 깔고. 저희 손으로 직접 한 것들이 많으니까 어설프지만 손님들이 편안한 느낌을 가지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도시에 있다가 고향으로 다들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약간의 차별성이 있지 않을까요. 여기를 저희가 만들어냈다는 게 좀 뿌듯해요. 번쩍번쩍한 공간은 아니어도 모든 곳에 저희 흔적이 있고, 모든 곳에 약간은 어설프지만 애정이 담긴 공간이라서 그래서 더 여기를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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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애정이 커졌다. 일제 강점기 개발과 수탈의 한복판에 있던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몇십 킬로미터의 거대한 둑을 쌓고 강줄기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강둑이 일제 강점기 수백만 명의 눈물과 땀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난 뒤, 이 사람 눈에 보이는 풍경이 그 이전과 달리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페가 자리 잡은 터가 일제 강점기 대장촌의 대표적인 지주였던 일본인이 40년 가깝게 살았던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매일 밟고 다니는 흙조차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 도회지 감성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그 도회지 감성을 이 농촌 마을에 입히려고 한다는 생각도 좀 들었어요.

"어쨌든 이 마을이 많이 알려지고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다만 저는 이 동네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해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거든요. 약간의 편리한 뭔가가 생기되, 이 지역과 어우러지는 느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사실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4월만 돼도 커피를 만드는 공간은 덥다 못해 뜨겁다. 한겨울 게스트 하우스에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죽을 고생을 한 적도 있고 새, 고양이 물그릇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몰상식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싶은데 꿀꺽 삼킨다. "담배꽁초 입에 넣고 삼키세요!" 커피 한 잔 값이 뭐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하는 사람이나 마을 주민들에게 왜 싸게 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전히 당혹스럽다. 성적인 농담이나 성희롱에 가까운 언사를 내뱉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제 사생활에 대해 묻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여기서는 가끔 그런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죠, 사실 근데 무례한 거는 서울이나 여기나 다 마찬가지라서 그런 일이 있어도 그냥 언니랑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고 또 며칠 지나면 잊어버리고 그러죠. 근데 저 혼자 있었으면 못 견뎠을 것 같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고 나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금방 이런 힘든 일도 털어버리고 지낼 수 있는 거 같아요. 또 시간이 지나니까 무뎌지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디저트 카페를 찾기 어렵고 전시회를 비롯한 문화생활공간도 충분치 않다. 가장 아쉬운 것은 친구다. 중학교 때 고향을 떠나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거의 없다. 경험과 지식을 나눌 수 있는 또래들이 이 동네에는 없다. 눈을 익산으로 넓혀봐도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친구를 만나려면 여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인터뷰를 하던 날 청년 지원 관련 익산시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최대 3천만 원을 지원받는다. 카페 옆에 일과 휴식을 같이 할 수 있는 이른바 워케이션 공간을 올해 말까지 만들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 지원은 힘이 되지만 지원을 받으려고 준비할 때마다 번거롭고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신청 서류 항목에 있는 '지역 가치 창출 여부', '사업 의지', '실현 가능성', '실효성', '지속 가능성' 항목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 말이 그 말 같은 것을 채워 넣는 것도 고역이지만 일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서류 잘 꾸미고 발표 잘하는 사람을 뽑으려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춘포는 '감성 여행'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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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한그루 여행사 대표 최혁이다. 최희서에게 춘포에 같이 가자고 제안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과 중국에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해봤다. 건물을 올릴 만큼 돈을 벌기도 했고 크게 망해도 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행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외국 소도시 여행이 취미인 사람이다. 그런 최혁의 눈에 춘포는 놓치기 너무 아까운 감성 여행의 보고 같은 곳이다. 고향 부근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할 만한 곳을 찾다가 우연히 춘포를 알게 됐다. 자신이 이 동네에 반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 동네를 한 번 제대로 보기만 하면 이 동네에 반할 것이라고 믿는다. 최혁의 생각은 '촌캉스' '워케이션' '감성 여행'이란 말에 다 녹아 있었다.

"제가 일본 소도시 여행을 하면서 우리나라도 작은 마을 관광이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단체 여행 다니고 구경하러 다녔지만 이제 트렌드가 달라졌습니다. 가족단위로 시골에 가서 자전거 타고 강바람 쐬는 것으로 충분한 거예요. 그게 바로 촌캉스인 거예요. 그런 곳으로 춘포만큼 좋은 곳이 없어요."
- 최혁, <카페 춘포> 대표


우연히 구입한 이 집이 일제 강점기 전북 지역의 유지이자 대지주였던 일본인 이마무라 이치로가 살던 집이라는 것도, 춘포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지주들이 터를 잡은 곳이고 그곳에서 일본인과 조선 농민들이 울타리를 함께 하고 살던 특이한 역사를 지닌 동네라는 것도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최혁은 기꺼이 카페를 관광 안내소로 삼고, 자신은 춘포의 관광 가이드가 되려고 한다. 마을을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든 기꺼이 고개를 조아리고 허리를 숙일 생각도 있다.

"제가 사실 지금까지 그렇게 이웃이나 누구한테 관심 보이고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적도 별로 없고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장님이 부르면 네 하고 달려가고 '제가 뭐 할 게 없을까요'라고 말합니다. 이 동네가 가능성이 있고 제가 그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지요."
- 최혁, <카페 춘포> 대표


지난달 익산시장과 지역주민들의 대화의 자리에서 이 마을의 관광 자원과 미래 비전에 대해 직접 PPT를 제작해 설명한 것도 마을 일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자리 이후에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한동안 공무원 전화가 빗발쳤지만 요즘은 다시 뜸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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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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