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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이슈 미술의 세계

3천만원 피카소책 완판 … 100년 전통이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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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19년 출판한 이우환의 6m 폭의 드로잉 에디션. 단 10부만 제작됐다. Cahiers 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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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 이클립스' 등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로 일했던 스테판 아렌버그(66)는 2011년 4월의 어느 아침, 파리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출판사를 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술 비평지를 펴내던 카이에다르 건물이 먼지가 쌓인 채 문을 닫고 있는 걸 발견한 그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회사를 팔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카이에다르는 1926년 그리스 비평가 크리스티안 제르보스가 설립해 어니스트 헤밍웨이, 사뮈엘 베게트 등이 비평을 했던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예술 출판사 중 하나였다. 인수를 한 뒤 1960년대 이후 끊어진 예술책의 전통을 되살리려 그는 매년 책과 잡지가 합쳐진 새로운 형식의 매거진(Revue)을 부활시켰다.

4일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알렉산더 칼더 전시와 이우환 전시 참석차 방한한 그를 최근 만났다. 아렌버그는 "말 그대로 사고처럼 일어난 일이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들었던 대단한 명성의 출판사를 발견한 것"이라며 "부친이 대단한 미술 수집가였고, 나는 미술 작품에 둘러싸여 자랐지만 내가 미술 출판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날 아침, 나는 출판인이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미술잡지 문외한이었던 그가 명가를 재건한 비결은 미술계 '드림팀'의 합류였다. 친구였던 바이엘러재단 전시감독 샘 켈러, 서펜타인갤러리 전시감독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등이 편집진으로 참여했다.

그는 자신이 책을 만드는 철학을 "오늘의 최고의 예술가와 100년 전 설립자 제브로스 시대의 최고의 예술가 간 만남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012년 흑백으로 칼더의 세계를 조명한 첫 책을 펴낸 이후, 첫 매거진으로 엘즈워스 켈리를 선보였다. 이후 1세기 전부터 끈끈한 인연을 자랑하는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칼더를 비롯해 호안 미로, 프랭크 게리, 크리스토 등에게 헌정하는 책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예술품처럼 세공한 책은 한정 수량을 찍어 출간했기 때문에 쉽게 품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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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기록된 거장의 책을 낼 수 있는 비결을 묻자 그는 "이들은 가족과도 같다. 1926년 창간한 잡지의 첫 표지가 마티스였다. 거장들의 자녀, 손주들과 직접 연결돼 협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이에다르의 대표작은 1932년 제브로스가 편찬한 피카소의 전작 도록인 '카탈로그 레조네'다. 33권에 1만6000여 점의 전작이 모두 실려 고서점에서 가격이 2억원에 달할 만큼 귀하게 거래된다. 아렌버그 대표는 대중화를 위해 2014년 1250부(영어·프랑스어)를 2만5000달러(약 3000만원)에 재출간했다. 그는 "500부를 더 찍었지만 완판돼 다시 제작할 계획이 있다"며 "스페인어, 아랍어로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카이에다르는 넓은 안목으로 아시아 작가인 스기모토 히로시, 아이웨이웨이, 김용익, 구정아의 전시도 열었다. 2019년에는 이우환의 첫 출판물 전시를 열어 파리 시민에게 사랑받기도 했다. 아트북과 함께 길이가 6m에 달하는 펼치는 형식의 드로잉이 담긴 한정판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칼더와 이우환은 추상적 공간을 공유하고 명상적이면서도 유희적인 작품을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전시를 기대했다.

그는 부친의 유산을 포함해 7000여 점을 소장한 컬렉터로도 유명하다. 좋은 컬렉터가 되는 법을 묻자 그는 "나도 모른다. 내 취향을 믿을 뿐이다. 19세 때부터 컬렉팅을 했고 난 언제나 시각예술과 지식의 연결을 흥미로워했다"면서 "돌이켜보면 나는 늘 아트딜러가 되지 않으면서, 예술가와 예술이라는 세계에 연결되고 싶었다. 나는 이 꿈을 예술 출판을 하며 결국 이뤘다"고 말했다.

작년 '아트바젤 파리'가 처음 열리는 등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 중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에게 비결을 물었다. "파리는 언제나 예술의 중심지였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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