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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경비원은 석달짜리 파리 목숨"…갑질 시달리는 '제2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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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에 아파도 휴가 엄두 못내…"아쉬운 건 우리, 항의 못 해"

경비원갑질방지법, 300세대 이상 적용…소규모 단지 사각지대

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아파트에서 숨진 경비원 추모 기자회견 하는 경비노동자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최윤선 수습기자 = "70, 80 넘은 사람들이 어디에 이력서를 내겠어요. 내봤자 이런 데지."

아파트 경비원 A(81)씨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40여세대가 사는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의 경비원이다.

한때 꽤 큰 규모의 식당 사장이었던 그는 60대 초반에 가게를 접고 경비원 일을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아파트를 열군데 넘게 전전하는 동안 말 못 할 일도 많이 당했다고 했다.

그는 '야속한 일'이라고 얼버무렸지만 그의 표정엔 '모욕'의 기억이 묻어났다.

A씨의 지난 20년간 삶의 궤적은 또래의 동료 경비원과 비슷하다.

퇴직 이후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일해야 하는 고령층 상당수가 찾는 직업은 경비원이다. 예순을 넘긴 구직자가 경력을 살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탓이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전국 경비원 26만9천명 중 79.6%가 60세 이상의 고령이다. 70세 이상도 30%에 육박한다.

경비원으로 시작한 '제2의 인생'은 불안정하고 고달프다.

낮은 임금과 경비 외 업무, 휴가 거부 등 부당한 처우가 기다리고 있다. 일흔이 넘어가면 근무 환경이 더욱 열악한 소단지 아파트로 밀려나 최저 임금만 간신히 받고 잡일을 도맡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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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앞에 모인 경비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늙은 경비원들'은 지난달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의 70대 경비원이 관리자의 갑질을 폭로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을 두고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경비원 대부분이 비슷한 일을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다고 했다.

"16년을 거기서 일했는데…"

A씨는 몇 년 전 몸이 아파 휴가를 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용역회사에서 돌아온 냉정한 대답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의사가 간이 안 좋다며 정밀 검사를 받자고 해 용역 회사에 일주일만 휴가를 쓰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소형 아파트는 관리 인원이 적어 경비 업무 외 각종 잡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리수거는 기본이고 청소, 수리, 발레파킹, 택배 옮기기까지 군말 없이 해야 한다.

강남구의 200여세대짜리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B(76)씨는 며칠 전 2m가 넘는 장미 나무 수십 그루를 혼자서 손질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눈썹 위에 깊이 팬 상처를 보여주며 "경비원 일도 아닌 일을 혼자서 하는데도 관리소장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더라"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비슷한 규모의 강동구 아파트에서 일하는 김모(78)씨는 24시간 간격으로 교대근무를 한다. 하루 2시간 남짓한 휴게시간은 사실상 대기 상태다. 언제든 '부르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일하고도 딱 최저임금(시간당 9천620원)만 받는다. 휴가는 근무한 8년 내내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고 했다.

강남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정모(81)씨는 중학교 경비원으로 3년간 근무하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재계약에 실패해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한다.

정씨는 "나이 든 사람은 대부분 석달 단위로 계약을 맺는다. 마음에 안 들면 자르기 편하기 때문"이라며 초단기 계약을 해야 하는 경비원은 '파리 목숨'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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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경비원 (PG)
[홍소영 제작] 일러스트


아파트 경비원의 부당한 처우는 어제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도 경비원의 업무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근본 원인은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노동 약자'이기 때문이다.

노령에 일자리가 마땅치 않고 당장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해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갑질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려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아쉬운 사람은 결국 자신들이기 때문에 항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등포구 아파트 경비원 이모(71)씨는 "친구 10명 중 8명은 노후대책이 마땅히 없어 경비원 일을 하고 있는데 다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며 "여기서도 쫓겨나면 이 나이에 받아줄 곳이 없으니 그냥 다 참아내고 일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후 대책이 여전히 허약하고 노령 인구가 급증하면서 경비원 인력시장에서 공급이 과잉돼 초단기계약이나 용역 업체에 의한 간접 고용 문제는 해법이 멀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잘라도' 일할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경비원 5명 중 1명이 3개월마다 갱신되는 근로계약을 맺고, 5명 중 4명은 아파트에 직접 고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소단지 아파트의 경우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곳이 태반이다.

300세대 이하 아파트는 일명 '경비원 갑질 방지법'인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 적용도 받지 않아 사각지대가 됐다.

남우근 한국비정규센터 정책연구위원은 2일 "작은 규모의 아파트 경비원은 근로계약서는 물론이고 임금 명세서도 없다"며 "상시적인 근로 감독이 없는 만큼 노동자 당사자가 나서야 하는데 노년층은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해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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