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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배터리 잔량 5%, 고장난 충전기 앞 망연자실”···공용인프라는 아직 ‘느림보’[전기차, 아직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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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역에 설치된 전기차 충전소에서 한 시민이 충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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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초 국산 전기차를 구매해 1년여간 타 온 40대 직장인 A씨는 지난달 아주 난처한 일을 겪었다. 가족의 생일을 맞아 지방에 있는 처가를 방문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며칠간 야근으로 늦게 퇴근해 아파트 충전구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잠에 든 게 화근이었다. 그래도 150km 정도 달릴 배터리 잔량이 남아 ‘휴게소에서 요기나 하면서 충전하자’는 요량으로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첫번째 휴게소는 충전 구역이 만원이었다. 소형 전기트럭들이 이미 대다수 충전기를 차지하고 있었고 차례를 기다리는 승용차들의 줄도 길었다.

두번째 휴게소도 마찬가지였다. 다급해진 A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일반 국도변에 있는 충전소를 가까스로 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충전기가 고장나 있었다. A씨는 “배터리 부족 경고 메시지가 뜨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행히 5km 인근에 다른 충전소를 찾아 겨우 충전을 마쳤다”며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로변에 멈춰 보험사를 불러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도 안 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타고 말 사람은 없다.” 국내 전기차 차주들이 내연기관 차주들과 대화할 때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조용하고 깨끗하면서도 초반 가속성능은 스포츠카 못잖다.

이처럼 만족도가 높은 전기차 사용자들에게도 취약한 아킬레스건이 있다. 역시 충전 문제다. A씨 사례는 국내 전기차 이용자들이 겪는 불편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1월 기준 국내 공용충전기 숫자는 약 19만9000여대 수준이다. 2020년 6만대 수준에서 3배 이상 늘어난 숫자다. 국내 전기차 보급대수(39만대)와 비교하면 넉넉해 보이지만, 이 숫자에는 맹점이 있다.

한국은 공동주택(아파트) 거주 비중이 높다. 단독주택 거주 비율이 높아 비공용 개별 충전기 설치가 가능한 미국·유럽 등 해외에 비해 공공 충전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아무리 가정이나 회사 충전시설인 이른바 ‘집밥’ ‘회사밥’이 갖춰져 있다고 해도, 차주의 통제하에 있지 않은 공용 인프라를 이용할 일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 전기차 충전플랫폼 스타트업 ‘체인라이트닝컴퍼니’가 지난해 12월 전기차 보유자 1826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명 중 1명은 ‘주 2회 이상’ 거주지 바깥의 공용 충전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집밥 미보유자의 60.4%, 집밥 보유자 중 35.0%가 주 2회 이상 거주지 외 충전소를 이용한다고 응답했다. 심지어 거주지에 충전대책을 확보하지 못한 ‘집밥 미보유’ 응답자의 14.7%는 배터리를 채우기 위해 차로 30분 이상 거리의 충전소까지 방문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하나 문제는 공용 충전소의 신뢰도가 낮다는 것. 테슬라 전기차를 2년째 타는 30대 직장인 B씨는 “다시 내연기관으로 돌아갈 어떠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전기차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거주지에 충전기가 있어 퇴근 후 완속 충전을 이용한다”면서도 “공용 충전기는 고장이 너무 잦다”라고 불평했다. B씨는 “테슬라의 전용 충전기는 꽂자마자 바로 충전이 되는 반면, 다른 공용 충전기들은 결제 과정이 너무 복잡한 데다가 심지어 충전을 하려고 차를 댔는데 고장이 난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장난 충전기를 맞닥뜨리는 경험은 전기차 차주 대부분이 갖고 있다. 체인라이트닝컴퍼니가 전기차 보유자 1826명에 더해 미보유자 3292명까지(렌트 등으로 전기차 경험자) 총 5118명에게 설문한 결과, 충전기 고장을 겪었다는 답변은 1540건에 달했다. 그 중 ‘충전기에 오류 표시가 나 있었다’는 응답이 480건(31.2%)이었고 ‘차량과 연결되지 않음(444건·28.8%)’ ‘충전되지 않음(399건·25.9%)’ 등이 뒤를 이었다. 물론 충전기에 오류 코드가 표시되면 연결·충전 불량이 동시에 따라올 수 있기 때문에 일부 답변은 중복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전기차 이용자가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채’ 공용 충전소에 도착해서야 먹통이 된 기계를 마주하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꽤 자주 겪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전기차 충전산업은 크게 제조·생산업체와 충전사업자(CPO)로 나뉜다. 대표적인 제조회사는 시그넷이브이와 중앙제어, 대영채비 등이 있다. 시그넷이브이는 SK㈜에 인수돼 SK시그넷으로 사명이 바뀌었고 중앙제어도 롯데정보통신에 인수되면서 충전기 제조 분야에는 대기업 자본이 대다수 진출해 있다.

반면 충전기를 설치·관리·운영하는 충전사업자 영역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민간 사업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다. 파워큐브, 에버온, 차지비, 지에스커넥트 등 중견 강자들이 포진하고 있긴 하나, 규모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곳도 많다.

충전기 설치 시 대당 지급되는 보조금을 노리고 뛰어든 중소규모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다.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에 따르면 현재 전기차 충전사업자로 등록된 업체는 413곳으로, 2021년 말 186개에 견줘 1년여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다. 그 중 73.5%인 303곳이 중소기업이고, 개인사업자도 22곳이다.

문제는 관리주체가 영세하다 보니 고장수리 등 유지·보수가 미흡한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24시간 콜센터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소비자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사업자 간 결제방식이 통일되지 않아 생기는 불편함도 다반사다. 대부분의 충전기는 신용카드 결제를 지원하지 않는다. 전기차 차주들은 업체별 충전 카드를 발급받아 요금 결제에 이용하는데 업체가 많다 보니, 전기차를 몰다 보면 많게는 10장 이상 발급받는 경우도 흔하다. 이를 보관할 카드꽂이까지 장만했다는 이용자도 있다. 최근 한 회사의 카드로 타사의 충전기를 사용하는 ‘로밍’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직 로밍 네트워크가 모든 사업자들 사이에 형성돼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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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9개월째 전기자동차를 타고 있는 회사원 박모씨(34)는 “충전소별 회원 카드만 6개”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대영채비, 이브이존(차지인), 차지비, 에버온, 환경부, 이비랑(이카플러그) 충전카드. 박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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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한국전기차사용자협회장은 “CPO가 많다 보니 서로 로밍이 되지 않는 충전기들이 많다”며 “최소한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CPO라면 충전기 로밍 확대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충전소의 양적 확대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한 시도를 병행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올해 105억원의 국비를 지원해 50㎾급 급속충전기 600대 이상을 구축할 예정이다. 3월 심사를 거쳐 4월 중으로 지원대상 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산업부는 “보급된 충전기 관리를 위해 한국에너지공단과 함께 정기적인 현장 점검을 실시하고 충전기 관리 실태도 조사할 예정”이라며 “야간과 휴일에도 충전 사업자가 충전기 고장에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불편신고 접수창구를 하반기 중 마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강화하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서 시장의 불량 사업자들이 자연스럽게 퇴출되고 사용자 만족도가 높은 업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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